비가 그치면 떠나자고 말하려 했다.

닿지 못한 고백, 멈춰버린 스무 살

by 불완젼


00.

삐뽀, 삐뽀.

형사 한 명이 진흙이 잔뜩 묻은 구두를 콘크리트 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왔다. 입에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막대 사탕 하나가 물려 있었다.


"뭐, 작은 외딴 시골 마을에서 큰 사건이겠습니까?"

형사는 제발 별일 아니길 바란다는 듯 넌지시 물었다. 시신을 살피던 검시관은 건조한 톤으로 대답했다.


"여기는 순찰이나 도는 파출소가 다일 텐데, 옆 도시에서 나오셨나요?"

"예예, 여기 인력으로는 감당 못 할 사건이면 어쩌냐 그래서.... 아, 귀찮게."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신발 끝에 걸린 작은 돌멩이를 톡 하고 찼다. 돌멩이가 검시관의 등 위로 튀었지만, 검시관은 미동도 하지 않고 바닥에 누운 시신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시신은 단발머리, 하얀색 반팔 셔츠에 짙은 청바지 차림이었다. 끼고 있던 안경은 금이 간 채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고, 운동화 한 짝은 벗겨져 덩그러니 흙탕물 속에 처박혀 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지만, 별다른 저항 흔적 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외진 산길을 걷다 빗길에 미끄러져 굴러떨어진, 전형적인 실족사 현장이었다.


"특별한 타살 흔적은 없습니다."


"거봐요. 이 고인 물 같은 동네에 무슨 큰일이 났겠습니까? 그냥 새벽비에 미끄러진 거죠."


형사는 안도하며 사탕을 우드득 깨물었다.


"시신 자체에 외상은 없지만... 소지품이 하나도 없네요. 핸드폰도, 지갑도. 요즘 젊은 친구치고는 이상하죠."


띠리리리, 띠리리리.

형사의 전화벨이 울렸다.


"네, 팀장님. 현장 왔습니다. 단순 실족사 같습니다. 네? 제보자요? ...하,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형사의 표정이 구겨졌다. 쉽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사건이 귀찮게 꼬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01.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작은 마을. 이곳에 남은 사람이라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들과, 어쩔 수 없이 귀농해 땅만 파먹고 사는 몇몇 부부뿐이었다. 집 안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알 정도로 비밀이 없는 곳.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따분한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곤 강 씨 영감네 처마 밑 말벌집을 태운 일이 전부였다.

이 정적인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가 딱 둘 있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은하와 영광이었다.

은하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오 씨 집안의 외동딸이었고, 영광은 부모가 도망쳐버려 이 씨 할멈 손에 자란 손자였다.



02.

은하와 영광은 늘 붙어 다녔다. 마을 어른들은 "나중에 둘이 살림 차리면 되겠네"라며 우스갯소리를 던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은하는 얼굴을 붉혔고, 영광은 "이런 촌구석에서 누구랑 살아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열아홉 살 여름,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둘은 말리던 고추를 걷어 창고로 숨어들었다.


"와, 이렇게 억수로 쏟아지면 우리 마을도 잠기겠다, 그치?"


은하가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웃었다. 빗물에 젖은 얇은 티셔츠 너머로 살결이 비쳤다. 영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말이 되냐. 고작 비 좀 온다고 잠기게."


두 사람은 창고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눅눅한 습기와 빗소리가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영광아."


"어?"


"하고 싶은 걸 하러 떠나면... 우린 영영 남이 되는 걸까?"


그 말에 영광은 대답 대신 은하를 바라보았다. 열아홉, 청춘의 열기가 좁은 창고 안을 데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감정이 시키는 대로 서로에게 몸을 맡겼다. 빗소리에 섞인 거친 숨소리, 서로에게 닿은 뜨거운 체온. 비가 그칠 때까지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엉겨 있었다.


03.

그날 이후, 영광은 은하를 볼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은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해 보였다. 영광은 혼란스러웠다. 그날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한순간의 충동이었을까.


그 무렵, 은하네 집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조용히 밥을 먹던 은하 엄마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영광이랑 너무 붙어 다니지 마라."


은하는 괜히 찌개 속에 있는 고기를 뒤적거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어른들 말대로 결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 "......"


은하 엄마는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삶은 고단했다. 스물 초반, 뭣 모르고 열다섯 살이나 많은 남편에게 시집을 왔다. 남편은 틈만 나면 술을 마셨고, 고된 밭일과 생계는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남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는 슬픔보다 안도를 먼저 느꼈다. 그 죄책감과 고단함이 그녀의 뼈마디에 사무쳐 있었다.


"엄마는 네가 이 마을 밖에서 살아도 보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보고 결정했으면 좋겠다."


은하 엄마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엄마처럼 살지 마. 아무것도 모르고 촌구석에 갇혀서 하늘만 보고 살지 말라고. 떠밀리듯 여기서 늙어가지 마라, 제발."


엄마의 진심이 담긴 말에 은하는 밥을 한 숟가락 꾹 눌러 담아 삼켰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엄마, 나는 영광이가 좋아. 근데... 영광이는 하고 싶은 걸 하러 떠날 것 같아."

은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엄마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남녀가 붙어 다니니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은하의 말끝이 묘하게 떨렸다.


"은하야, 너는 하고 싶은 게 없어? 왜 영광이만 떠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해."


은하는 다 먹은 밥그릇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이 마을을 나가면 내가 뭘 해야 할지... 겁이 나."

엄마는 말없이 다 먹은 반찬 그릇을 치웠다. 딸이 느끼는 두려움이, 사실은 자신이 딸을 너무 품 안에만 가두어 키운 탓인 것 같아 가슴이 아렸다.



04.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영광과 은하는 여전히 붙어 다녔지만,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영광은 은하를 볼 때마다 입술을 옴짝달짝했다. '같이 가자고 할까?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면, 같이 떠나자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은하의 무덤덤한 표정 앞에서 매번 가로막혔다.


은하 역시 영광의 시선을 느꼈다. '나도 가고 싶어. 너랑 같이.' 하지만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엄마의 굽은 등이 눈에 밟혔다. 은하는 먼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보다가도, 다시 땅을 보고 호미질을 했다.


그 사이, 이씨 할멈의 불안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영광아, 테레비 좀 틀어다오."

영광이 틀어준 드라마에서는 세련된 도시 남녀가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내던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저, 저, 미친 짓거리들. 사랑이 밥 멕여주냐."


영광은 방으로 돌아와 책상 서랍에 숨겨둔 낡은 공책을 꺼냈다. 이 마을을 떠나게 되면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둔 '탈출 리스트'였다.


남산 타워 가보기. ...


양복 입고 출근하기.


영광은 연필을 쥐고 잠시 망설이다가, 가장 밑에 10번 항목을 꾹꾹 눌러 썼다.


10. 사랑해보기.


사랑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광은 그 사랑이 사무치게 궁금했다. 자신을 버리고 갈 만큼 대단한 것인지, 은하를 볼 때 뛰는 이 심장이 그것인지.

그때,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할머니가 그 공책을 보았다. 할머니의 눈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에 꽂혔다.


"이게 뭐냐... 사랑?"


할머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20년 전, 서울로 대학 보낸 아들이 웬 여자와 눈이 맞아 학업도 때려치우고

갓난쟁이 영광이만 덜렁 맡기고 도망쳤다. "어머니, 저희는 사랑 없인 못 살아요. 이해해 주세요." 그 '사랑'이라는 역겨운 단어가, 내 아들을 뺏어가고 내 인생을 망쳤다.


그런데 이제 손자 놈마저 '사랑'을 찾겠다고 한다. 할머니의 눈에 영광이 겹쳐 보였다. 지 아비랑 똑같은 놈. 사랑을 쫓아 나를 버리고 갈 놈. 할머니는 공포에 질렸다. 절대로, 두 번은 뺏길 수 없었다.



05.

몇 달이 지났을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저녁이었다. 영광은 결심을 굳혔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오늘 말하자. 같이 떠나자고.' 그는 은하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 연습하기 위해 우산을 쓰고 마을 뒷산 정자로 향했다.

영광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직감했다. 저놈이 오늘 기어코 떠나겠구나. 은하 년이랑 작당하고 나가겠구나.


마침, 은하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할머니, 영광이 있어?"


할머니는 은하를 노려보았다. 네년 때문이야. 네년이 내 손자 가슴에 바람을 넣었어. 불안과 집착이 노인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영광이 그 놈, 갔다."

"어?"

"결국 지 애비처럼 사랑 찾아 서울 간다고 짐 싸 들고 나갔어! 이제 안 돌아올겨! 다신 안 온대!"


할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해서라도 둘을 떼어놓으면, 영광이가 다시 돌아와 내 옆에 앉아있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거짓말은 비수가 되어 은하의 가슴에 꽂혔다.


'나를 두고 갔구나. 인사도 없이... 결국 나만 남겨졌구나.'


은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굵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산 하나만 넘으면 있는 버스 터미널, 그곳에 가면 영광이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나도 데려가 달라고 말해야 했다.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한 번만 이기적이고 싶었다.

그렇게 은하는 폭우가 쏟아지는 산길을 오르다, 진흙에 미끄러져 굴러떨어졌다.

그 시각, 영광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정자에 앉아, 은하에게 건넬 "사랑한다, 같이 가자"는 말을 수없이 연습하고 있었다.



06.

"사고사 맞네요. 빗길에 실족."


형사는 파출소에서 조서를 꾸미며 건조하게 말했다. 영광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파출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신이 바보같이 고백을 연습하러 나가지만 않았어도, 할머니가 쓸데없는 거짓말만 하지 않았어도 은하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씨 할멈은 경찰서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울먹이며 변명했다.


"내가 죽으라고 그랬나... 그냥 쟤가 떠날까 봐 겁나서... 지 애비처럼 사랑 타령하며 날 버리고 갈까 봐... 그래서 그랬는데..."


그 말이 영광의 가슴을 후벼 팠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사랑'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았는데, 이제는 그 사랑을 해보려다 은하마저 잃었다. 사랑은 영광에게 저주였다.

형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건을 종결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러게 밤에 왜 산을 타냐"며 혀를 찼다. 아무도 은하의 죽음을, 그리고 남겨진 자의 고통을 진심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07.

영광은 은하의 방을 정리하러 갔다. 책상 깊은 곳에서 낡은 일기장이 나왔다.


창고에서 비를 피하던 날, 빗소리보다 내 심장 소리가 더 컸다. 영광이가 숨을 몰아쉴 때, 나는 처음으로 살아있다고 느꼈다. 영광이는 떠날 것이다. 나는 안다. 나도 가고 싶다. 하지만 혼자 남을 엄마가 눈에 밟혀 차마 갈 수가 없다. 그래도 만약... 아주 만약에 영광이가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어 준다면... 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빌고, 그 손을 잡고 싶다.


일기장 위로 영광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은하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주길.

은하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광은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제가 늦게 말해서..."

"너도 읽었니?"


은하 엄마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녀는 영광을 일으켜 세웠다.


"솔직히 네가 미웠다. 네가 떠난다는 헛소문 때문에 내 딸이 빗길을 뛰었다는 걸 알았을 때, 네가 죽도록 미웠어."


"......"


"그런데 영광아. 은하는 너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이 마을이, 아니 내가 은하를 가둬둬서 죽은 거야. 엄마를 버리고 떠나면 죄인이라는 생각을 심어줘서, 그래서 걔가 그 빗길을 혼자 넘으려다 그렇게 된 거야."


은하 엄마는 영광의 어깨를 꽉 쥐었다. 떨리는 손끝에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체념이 느껴졌다.


"그러니 너는 가라."

"여기서 주저앉아 죄책감에 파묻혀 살지 마. 그러면 은하는 죽어서도 이 마을 귀신 못 면해. 네가 나가서, 은하가 못 본 세상 보고, 은하가 못 산 인생까지 살아. 그래야 우리 은하가 너 따라서 이 징글징글한 산골짜기 벗어날 거 아니냐."


그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딸을 위한, 그리고 남은 청춘을 위한 엄마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08.

장례식은 마을만큼이나 고요하고 초라했다. 은하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작은 유골함에 담겼다. 관을 들어줄 젊은 친구 하나 없어, 예의상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와 영광이가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왔다.

형사는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진 속 은하는 너무나 평범하고 앳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스무 살의 얼굴이었다.


'겨우 이거였나.'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별일 아니겠지"라며 사탕을 깨물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단순 실족사, 흔해 빠진 사고라고 치부했던 자신의 안일함이 역겨웠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닫힌 마을과 어른들의 이기심이, 날고 싶었던 작은 새의 날개를 꺾어버린 참담한 비극이었다.

사는 주머니 속 막대 사탕을 꺼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입안이 썼다.

"미안하다, 아가씨. 어른들이 참 못났다." 형사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09.

영광은 짐을 쌌다. 가방 맨 구석에는 10번 항목이 적힌 낡은 공책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씨 할멈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어딜 가냐, 나를 버리고 가냐, 이 나쁜 놈아"라며 악담을 퍼부었지만, 영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낡은 버스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창밖으로 지긋지긋한 산과 숲이 뒤로 밀려났다. 은하가 그토록 넘고 싶어 했지만, 끝내 넘지 못했던 그 숲이었다.


영광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빈 주머니였지만, 그날 창고에서의 온기는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었다. 눈을 감자 어둠 속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축축하고 뜨거웠던 그날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영광아..."

은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영광은 버스 좌석에 고개를 처박고 소리 죽여 울었다. 버스는 멈추지 않았다. 은하를 삼킨 숲을 넘어, 은하가 닿고 싶었던 세상 너머로 버스는 계속해서 달렸다.




*북커버 : 생성형 AI Gemini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