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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08. 2017

캘빈 앤 홉스, 탐험을 떠나자!


셜록과 왓슨,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처럼 늘 함께 하길 바라게 되는 커플들이 있다. 무지막지한 악동 캘빈의 단짝은 호랑이 홉스다. 타인의 눈에 홉스는 평범한 호랑이 인형처럼 보이지만 캘빈은 알고 있다. 홉스는 참치 샌드위치라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진짜 호랑이라는 걸.



프레임 밖의 사람들

촌철살인 네 컷짜리 카툰이 <Peanuts>의 영향력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Calvin and Hobbes> 역시 연재 초반만 해도 <Peanuts>의 아류작처럼 여겨졌다. 카툰 특유의 산뜻함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Calvin and Hobbes>는 진지하게 이면의 삶을 바라본다.

작가 빌 와트슨이 인터뷰에서 밝혔든 홉스는 그 자체로 이 세계관의 트릭이다. 홉스는 그저 홉스이다. 타인이 보기에 홉스는 호랑이 인형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건 홉스의 선택이다. 매일의 모험을 함께 해도 캘빈이 보는 것은 홉스의 특정한 면일뿐 그 선택에 개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홉스를 호랑이 인형으로 본다면 그것은 인형인 면으로서의 홉스를 목격한 것이다. 하나의 타임라인을 두고도 무수한 관점이 생겨난다.

빌 와트슨은 누구도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상상 속 친구들은 상상하는 주체의 조력자인데 반해 홉스는 파트너이다. 캘빈만이 온전히 볼 수 있지만 캘빈에게 종속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둘은 대등한 위치에서 모험과 일상을 공유해나간다.

호랑이를 잡을 때는 참치 샌드위치!


빌 와트슨은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의 세계가 보이는 것만큼 컬러풀 하지도, 낙관적이지도 않은 점에 특히 감명받았다. 와트슨의 캐릭터들도 낙관적이지 않은 설정을 안고 있다.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처럼 보이는 캘빈의 부모는 얼핏 부모의 역할에서도 전형적으로 비친다. 그러나 캘빈의 아빠는 직장 스트레스로 종종 무기력하다. 단정하고 제법 커리어가 있던 캘빈의 엄마는 육아로 인해 직장을 그만둔 상태다. 캘빈의 부모는 사회적 피로와 경력 단절 위에 서있는 ‘평범한 위기의 성인’들인 셈이다.


자상하게 나이 든 백인 여선생님처럼 보이는 미스 웜우드는 이름부터 악마에게서 따왔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를 쓴 C.S. 루이스의 <스크류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 1942> 속 악마 이름이다.) 선생이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지만 쉽게 밟아버릴 수도 있다.


캘빈의 베이비시터 로잘린은 이 세계관에서 누구보다 당당하다. 가차 없는 로잘린은 캘빈에게는 말할 것 없고 때로는 육아의 절박함을 이용해 캘빈의 부모에게까지 강자의 입장에 선다. 그러나 현실의 로잘린은 페이가 있다면 주말이건 평일이건 지독한 코흘리개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트 타임지로 출동한다. 그녀의 학자금 대출은 아직도 잔금이 상당할 것이다.


캘빈의 동급생 수지는 정직하고 똑똑하지만 그 장점으로 인해 또래들에게 시달린다. 상식적이고 예민한 이들이 더 상처받고 수치심을 느끼듯 수지는 이미 성별에 따른 이중 부정까지 본능적으로 느낀다. 캘빈이 나쁜 애가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그는 호의를 장난으로 밖에 표현 못하는 철부지이다.

빌 와트슨의 캐릭터 설정이 무척 비관적인 시트콤처럼 느껴지는데 씁쓸한 현실을 고급스러운 유머와 냉소로 구현하는 것이 <Calvin and Hobbes>의 매력일 것이다.



“거기 있어?” 

“아무도 없어!”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캘빈은 정말 창의적이다. 그의 장래는 종종 아티스트와 미친 창조자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규율을 이르는 부모에게 지지율 그래프가 떨어지고 있다고 브리핑하고, 등교하기 싫은 날 눈사람을 만들어 파업을 선언하며, 산수 숙제 앞에선 자신이 산수 무신론자라고 주장한다. 물론 학교에서 덧셈 문제를 풀 수 없는 것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수지는 캘빈의 주장 대부분이 헛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캘빈은 지금 대문자로 의사 표시 중이다.

"정신상담을 받게 하는 게 좋겠어"
'너무 엄격' '숙제 싫어!' '캘빈의 아빠는 불공정하다' '자유를''더 늦은 취침시간 더 적은 목욕' '나빠 아빠' / "사무실에선 누구도 이런 얘길 하진 않지"


어린이들에게 일상의 규율은 보호보다는 금기로 받아들여진다. 금지되었다는 것만으로 짜릿하다.

19금 서사에 대한 캘빈의 욕망은 종종 피와 폭력과 음모가 난무하는 하드보일드 속 탐정, 무정부주의 우주인 스피프, 심지어 ‘캘비노사우르스’라는 종의 공룡으로 변주된다. 한편으론 어린아이답게 침대 밑 괴물들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홉스마저 도와주지 않을 때면 캘빈은 침대 밑 괴물과 “거기 있어?” “아무도 없어!”라는 도시 괴담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캘빈의 상상들은 그가 어린아이임을 고려하면 낙관적으로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캘빈의 상상이 거침없는 것은 그가 아직 현실의 폭력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성인이 된 우리는 누구나 안다. 현실보다 더 무서운 호러는 없다는 걸. 침대 밑의 괴물처럼 ‘아무것도 없다’며 낙관적인 자조를 던져 보지만 사실 살아가는 것은 아무것이나 난입해 난장 칠 확률이 더 크다.




Let's go exploring!

상상의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상상하는 이의 취향에 맞춰진다. 그 한계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유년 시절이 끝난다. 이런 비밀을 알고 있던 빌 와트슨은 캘빈과 홉스의 탐험이 한창일 때 연재를 끝냈다.

조금이라도 먹힌다 싶으면 무한 프랜차이징 되는 시장에서 와트슨은 출판물 외의 모든 라이센싱 사업을 거부했다. 작품이 오로지 사유로 계승되길 바란 작가주의적 기질이 우아한 마무리를 가능하게 했다.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시점에서 작품을 끝낸 것은 곧 소멸될 유년의 친구를 박제한 것일까?

와트슨은 그들이 더 큰 모험을 떠나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상 속의 친구를 마음속에 영원히 둘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자신은 영원한 아이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얼핏 범상해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캘빈과 홉스의 새로운 모험이 호러가 아닌, 신나고 겪어볼 만한 탐험이길 바라는 따뜻한 지지로 가득하다.  

Let's go exploring! (http://www.gocomics.com/calvinandhobbes/1995/12/31)





@출처/ 

캘빈 앤 홉스 시리즈, 빌 와트슨 (Calvin and Hobbes, Bill Watterson, 1985-1995)

The Calvin and Hobbes 10th Anniversary Book (Andrews McMeel Publishing, 1995)


Calvin and Hobbes Official Comics : http://www.gocomics.com/calvinandhobbes/

Calvin and Hobbes Fan site : http://home.megapass.co.kr/~topsh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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