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강가나 숲 속 동물들, 꼬마 마녀와 물 요정, 주머니 속 고래와 레이스 속옷을 받쳐 입은 할머니. 누구에게나 한 번쯤 상상의 친구가 머물던 시기가 있다. 때로는 어른마저 불시착한 사막에서 소행성의 왕자를 만난다. 우디와 버즈, 토토로와 빙봉보다 훨씬 전에 만난 곰 인형 같은 나만의 친구 말이다.
#꼬마 물 요정, 모든 계절의 물방물 https://brunch.co.kr/@flatb201/79
#잘 가거라 호세피나, 주머니 속의 고래 https://brunch.co.kr/@flatb201/109
#사과나무 위의 할머니, 주고받기 https://brunch.co.kr/@flatb201/61
In which we are introduced to Winnie-the-Pooh and some bees, and the stories begin.
푸는 밀른의 아들 크리스토퍼 로빈의 테디 베어로 원래 이름은 에드워드이다. 위니펙 Winnipeg의 이름을 붙여 기증된 흑곰은 당시 인기 명소였던 런던 동물원에서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곰에게 반한 크리스토퍼 로빈은 자신의 테디 베어에게 위니 Winnie라는 수사를 붙인다. 푸 Pooh라는 명칭은 공원에서 즐겨 보았던 백조의 이름이라고 한다.
밀른은 아들이 그의 인형들을 의인화시킨 짧은 이야기에 동참하곤 했다. 이것을 발전시킨 것이 <Winnie the Pooh>이다. 디즈니 프랜차이즈로 인해 곰돌이 푸는 유명세만큼 친숙한 아동 캐릭터지만 애초 밀른의 구상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쪽에 가까웠다. 작가이자 시인이었던 밀른은 리듬감을 살린 운문에 많은 신경을 썼다. 당연히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달리 원전은 시적 상상력이 가득한 철학적인 이야기들이다.
아름다운 숲이 많기로 유명한 서섹스 지방을 배경으로 의인화된 동물들은 각자의 모험을 겪는다. 그 모험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과 무관할 수 없는 일상의 모험들이다.
In which Christopher Robin leads an expotition.
<Winnie the Pooh>의 일러스트를 의뢰 받은 어네스트 셰퍼드는 인생의 한 시기, 모든 것이었을 세계를 구현해 낸다. 명칭이나 설정은 동화적으로 윤색되었지만 작품의 모델이 된 애쉬다운 숲의 목가적인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풍경화가로 진즉에 명성 높던 셰퍼드지만 <Winnie the Pooh>의 생명력 넘치는 풍광과 캐릭터들은 풍경화를 넘어선 명성을 가져다준다. 이 명성은 비슷한 카테고리로 볼 수 있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The Wind in the Willows, Kenneth Grahame, 1931>의 일러스트로 더욱 공고해진다.
작품의 인기만큼 워낙 많은 판본이 있지만 내가 읽은 완역본은 문고판 전집 <계몽사 120>의 수록분이었다. 표지는 원전의 일러스트를 모사해 국내 작가가 그렸지만 본문은 셰퍼드의 펜 스케치가 그대로 실려있다.
동화적 판타지에 섬세한 리얼리티를 입힌 셰퍼드의 일러스트는 밀른의 설정을 완벽하게 가시화시켰다. 그러나 푸의 모델이 된 테디 베어는 크리스토퍼 로빈이 아닌 자신의 아들 그래험의 곰 인형 그로울러 Growler 였다. 손녀에게 물려진 그로울러는 이웃집 개가 물어뜯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90세까지 장수한 셰퍼드는 1970년대에 들어 초판의 펜 스케치들을 채색한 버전을 발표했다.
<메리 포핀스>의 일러스트로 유명한 메리 셰퍼드는 그의 딸이다. 메리 셰퍼드 역시 당대의 계급사회의 풍광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게 포착하는데 능했던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어제의 소망도 빛나길, 메리 포핀스 https://brunch.co.kr/@flatb201/91
In which Christopher Robin and Pooh come to an enchanted place, and we leave them there.
..세상에 있는 건 뭐든지 둘과 함께 갤리언스 랩에서 끝났지.
갑자기 크리스토퍼 로빈은 푸한테 몇 가지 것들을 얘기해 주기 시작했어. 왕과 여왕이라는 사람들, 인수 분해라고 하는 것, 유럽이라는 곳, 어떤 배도 가 본 적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 흡입 펌프를 만드는 법 (네가 만들고 싶다면), 기사가 작위를 받는 모습, 브라질에서는 무엇이 건너왔는가를.
..크리스토퍼 로빈은 거기에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세상이 멈추지 않기를 바랐어.
푸와 친구들에게 크리스토퍼 로빈은 그들의 역사를 시작하게 해 준 최초의 친구이다. 푸와 친구들이 로빈을 잃게 된 것은 그의 성장 때문이 아니다. 로빈에게 푸는 매듭을 풀지 못한 유년의 찌꺼기가 되고 만다. 아들로서 크리스토퍼 로빈의 실제 삶은 아버지 밀른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밀른에게는 나름의 부성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Winnie the Pooh> 속 화자와 달리 다정한 아버지가 아니었던 밀른은 본인의 작업이 훨씬 중요했다. 또 당시의 관습에 따라 유모 손에 키워진 크리스토퍼 로빈은 주로 인형들과 놀이방에서 지내야 했다. 성장하면서는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아버지 밀른과의 서먹함은 애증으로 악화되다 성인이 된 후 절연에 이른다.
<Winnie the Pooh>의 유명세도 그를 괴롭혔는데 부성애로 포장된 이 작품의 명성이 크리스토퍼 로빈에게 어떤 양가감정이 들게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상상 속 최고의 친구들은 그가 받아야 할 관심을 앗아갔다. 애초에 로빈이 푸를 비롯한 친구들을 상상했던 것도 외로움에서 기인한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해보면 더욱 아이러니하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커가면서 푸우를 잊었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성장하며 예상치 못한 양가감정을 주기도 했지만 푸가 있는 숲은 온전히 그에게서 시작된 세계였다. 푸가 가장 사랑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친구는 크리스토퍼 로빈뿐이었다. 로빈의 인정과는 무관하게 푸는 좋은 친구란 그냥 옆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체가 없다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시간 속에 가물거리게 되는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친구로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만나는 좋은 친구나 이웃은 상상 속 친구들이 형태를 갖춰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
위니 더 푸우, 앨런 알렉산더 밀른 (Winnie the Pooh, Alan Alexander Milne, 1926, 일러스트 어니스트 셰퍼드 Ernest H. Shepard)
푸우 코너의 집, 앨런 알렉산더 밀른 (The House at Pooh Corner, Alan Alexander Milne, 1928, 일러스트 어니스트 셰퍼드 Ernest H. Shepard)
Winnie the Pooh (Dean, 1999, 일러스트 어니스트 셰퍼드 Ernest H. Shepard)
계몽사 문고 74/120, 곰 푸우 (계몽사, 1979-1986, 번역 김요섭, 일러스트 표지 최충훈, 본문 어니스트 셰퍼드 Ernest H. Shepard)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 (현대지성, 2016, 번역 이종인, 일러스트 어니스트 셰퍼드 Ernest H. Shep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