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류도 다양한 유년시절의 몽상 중 친구가 빠질 수 없다. 딱히 결핍이나 소외 때문이 아니라도 혼자만 아는 상상 속의 친구를 가져보았을 것이다. 소년 산티아고의 주머니 속 고래 호세피나도 그만의 내밀한 친구이다.
언론가 겸 작가 호세 마리아 산체스 실바의 <잘 가거라, 호세피나>는 그의 다른 대표작 <빵 포도주 마르첼리노 Marcelino pan y vino, 1953>보다 훨씬 흥미롭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처음 읽은 중앙문화사 판본 외에 국내 발행본이 없는 것으로 안다.
<잘 가거라, 호세피나>는 별다른 사건 없이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혼자만 볼 수 있는 고래를 가진 소년 산티아고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추억을 쌓아간다.
창작의 세계에서 ‘바다’ ‘고래’라는 메타포는 진부함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작가는 담담하고 애틋하게 유년의 편린을 복기한다. 일상과 환상이 교차하는 에피소드들은 길고 긴 작가명만큼 이국적이고 낙천적인 정서가 스며있다.
담담한 어조에도 이 작품이 생동감으로 넘치는 것은 로렌조 고니의 감각적인 일러스트 때문이다.
탄탄한 데생을 바탕으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서사가 충실히 구현된다. 의도적인 생략과 과장은 실바의 서사처럼 교차되며 상상의 이질감을 능수능란하게 조율한다. 투명한 담채화 느낌으로 메꿔진 면들은 섬세한 선들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익살맞으면서도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는 교차되는 환상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산티아고가 고래를 물컵에 집어넣는 순간, 배경에 배치된 환상 속 항해와 의인화된 사물들은 상상의 친구를 더욱 극적으로 드러낸다.
인쇄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중앙문화사 판본은 표지 외에는 다수의 원화를 감상할 수 있다.
평범한 소년 ‘산티아고’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친구가 있다. 바로 산티아고만 볼 수 있는 ‘고래 호세피나’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둘은 언제나 함께였다.
때로는 강아지만큼, 때로는 코끼리만큼 자유자재로 몸집을 바꿀 수 있는 호세피나는 일만 톤에 일천 미터까지도 커질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손바닥 크기로 주머니 속에서 첨벙거리다 침대 옆 물컵 속에서 잠이 든다. 어떤 날 고래는 깜박 우유 컵에 집어넣어져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새우처럼 몸을 세운 채 유쾌하게 깡총거리기도 하고 푹신한 등에 산티아고를 태워 바다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고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신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고래는 때로는 섬이기도 하고, 잠수함이기도 했으며, 별이기도 하고, 보물이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다니게 된 산티아고는 고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호세피나만큼 특별한 고래는 어디에도 없다. 생선 먹는 것을 여전히 꺼릴 정도로 둘의 우정은 변함없다.
..세상의 아버지나 어머니들은 생선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상냥한 마음씨를 별로 모릅니다. 그러한 아이들은 대개 언제나 고래를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원할 때면 언제 어디든 함께인 고래와의 일상은 어느 순간 뜸해진다. 고학년이 된 산티아고는 현실 속 진짜 고래에 대한 배움이 반갑지만은 않다. 그의 고래가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정말로 말해서 넌 누구야?”
고래는 이 질문을 듣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더듬더듬 이야기하였습니다.
“전 고래여요. 당신의 고래..”
고래는 그 큰 몸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부터 슬퍼하며 정어리만큼 작아졌습니다.
..“내 말을 모르는군. 도대체 넌 누구냐고..”
“저는 하나님의 사소한 장난의 소산이어요.”
고래는 그다지 아는 것은 없지만 시인입니다. 산티아고는 이따금 마음속을 후련하게 해주는 그런 고래가 좋았습니다.
이전보다 좀 더 길게 휴가를 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고래는 산티아고와 함께 했다. 산티아고는 점점 고래보다는 축구와 공부, 새로운 친구들에게 관심 쏟게 된다. 그의 고래 이야기를 들은 산티아고의 절친이 깔깔거린다. 자신은 스스로를 ‘자동차’라고 여기며 놀았다고 고백한다.
“..이제는 다 큰걸.”
..어쨌든 이 일은 산티아고에게 두 가지 비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이제는 자기도 어리지 않다는 것을 고래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래는 이제 자유롭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산티아고는 여느 때처럼 물컵을 쥐고 말한다.
“고래, 잡았다. ..거기에 있니?”
그러나 고래는 대답하지 않는다. 서로가 곁에 있음을 느끼지만 산티아고의 결심을 알게 된 고래는 슬퍼한다. 각자 홀로 서야 할 때가 왔음을 알리며 고래는 작별을 고한다.
분명히 고래를 잃었다. 그래서 서글픈 마음이 들지만 한편으론 지금의 산티아고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자신이 속한 진짜 세계, 지식과 힘, 인식의 세계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무뚝뚝하게 고래는 멀어져 간다. 산티아고는 늘 고래를 넣어두었던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흔들며 소리친다.
“잘 가거라, 호세피나!”
낙천이고 신비한 남국의 정서를 가진 <잘 가거라, 호세피나>는 큰 인기를 끌며 영상화되었다. 일본 국제 영화사에서 제작한 TV 애니메이션은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었다.
추억 보정으로 윤색된 어린 시절의 기억은 디테일보다는 인상으로 각인되기 마련이다. 최근 검색해본 이 애니메이션은 기억보다 훨씬 발랄하고 명랑만화스러웠다. 그러나 소년을 태우고 도심 사이를 유유히 부유하던 고래, 그 나른하고 초연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무 이유 없이 만났던 고래는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진다. 그저 그럴 시간이 된 것이다.
산티아고의 작별 인사는 지나가는 줄도 몰랐던 유년과 그 시기에만 가질 수 있는 세계에 보내는 뒤늦은 배웅이다. 이 배웅의 순간 또한 언젠가는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누군가의 고래나 자동차를 엿보게 된 어떤 날, 묻혀있던 상상의 친구를 소환해주는 것도 이 흐릿하고 무용해 보이는 추억들이다.
그것이 부유하는 고래든, 분홍빛 코끼리 인형이든 스스로도 자각 못한 내밀한 소망을 지지해주던 최고의 친구였다는 사실과 함께.
@출처/
잘 가거라 호세피나, 호세 마리아 산체스 실바 (Adios, Josefina, Jose María Sánchez Silva, 1962, 일러스트 로렌조 고니 Lorenzo Goñi)
新しい世界の童話シリーズ 24, さよなら ホセフィーナ (学習研究社, 1968, 번역 에자키 케이코 江崎桂子, 일러스트 로렌조 고니 Lorenzo Goñi)
소년소녀 세계수상문학전집 30권, 잘 가거라 호세피나 (중앙문화사, 1977, 번역 김성숙, 일러스트 로렌조 고니 Lorenzo Goñi)
로렌조 고니 웹사이트 http://www.lorenzogoni.com
くじらのホセフィーナ (일본국제영화사, 1979)
왕고래 호세피나 (KBS 2TV, 1981)
#애니메이션 원전 비하인드 http://blog.naver.com/uru1981/220828938196
#한국 방영분 오프닝 http://blog.naver.com/kbrkjs/50111024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