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08. 2016

사과나무 위의 할머니, 주고받기


어린 시절 상상의 주체는 항상 자신이다. 그러나 거침없는 모험을 펼쳐나가는 상상에서조차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하는 때가 있다. 바로 상상 속의 나와 현실의 내가 충돌하는 순간이다. 

범접하지 못할 상상들로 현실에서 겪은 부족함이나 모멸을 메꾸어보려 하지만 물리적 체험은 상상마저 방해한다. 이런 순간에는 좀 더 초월적인 누군가가 등장해줘야 이 모험을 이어나갈 수 있다.

소년 안디는 어벤저스 같은 히어로가 아닌 멋들어진 구식 레이스 속옷을 입은 할머니를 택한다.


미라 로베의 대표작 <사과나무 위의 할머니>는 결핍된 소망을 가상의 존재로 채워가던 소년이 현실의 관계를 자각하는 성장담이다. 자유롭고 신기한 공상의 체험을 주는 상상 속 할머니와 그런 상상을 하나의 세계로 인정해 주는 현실의 할머니는 어른의 역할에 관해 말해준다.

중앙문화사 전집에는 수지 바이겔이 그린 원전의 일러스트가 실려있다. 단순하고 날렵한 스케치풍의 일러스트는 소년의 상상을 활력 넘치게 구현한다. 능력 넘치는 가상의 할머니도, 평범하지만 따뜻한 현실의 할머니도 그녀로 인해 사랑스러운 생명력을 얻는다.




‘안디’는 딱히 큰 불만은 없다. 바쁘지만 살가운 부모님, 형과 누나, 닥스훈트 베로까지 북적이는 가족의 막내로 살아가는 것은 퍽 분주하다. 방울모자도 세 개나 있는 이 소년이 요즘 아쉬운 한 가지는 ‘할머니’이다.

안디의 친구들 대부분은 놀이공원도 데려가고, 미국식 인사를 건네고, 갖가지 경험을 선사하는 할머니가 있다. 안디의 투정에 엄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사진을 보여준다.

어느 날 사과나무 위에서 만난 멋쟁이 할머니


그날 이후 혼자 사과나무 위에서 시간을 보내던 안디에게 할머니가 나타난다.

깃털 달린 모자와 레이스를 받친 드레스, 도넛처럼 돌돌 만 흰 머리칼은 사진 속 모습처럼 자신만만하고 멋지다. 기대대로 사과나무 할머니는 안디에게 더없이 멋진 모험의 시간을 선사한다. 놀이공원에 데려가는 것은 물론이고 스포츠 카로 질주하고, 호랑이 사냥을 떠나고, 해적과 전투를 벌인다.

안디가 사과나무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가족들은 ‘할머니 놀이’가 허구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사과나무 할머니는 안디에게 엉뚱하고 화려한 모험을 선사한다.


여느 때처럼 사과나무 할머니와 모험 중이던 안디는 이웃에 이사 온 핑크 할머니와 알게 된다.

다리가 불편한 핑크 할머니를 위해 안디는 자질구레한 일을 돕는다. 도움을 받은 할머니는 안디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구워주고 낡은 양말로 감자 벌레 저금통을 만들어준다.

안디는 핑크 할머니의 도움 아래 스스로 하는 작은 체험들이 즐거워진다.

핑크 할머니는 안디에게 주고 받는 감정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핑크 할머니와 친해질수록 사과나무 할머니는 점점 뜸하게 나타난다. 급기야 어느 날 사과나무 할머니가 호랑이를 타고 떠나버리는 꿈을 꾼다. 안디가 울적해 하자 핑크 할머니는 종종 다른 할머니 얘기를 들려달라고 말한다. 모두들 사과나무 할머니를 믿지 않았지만 핑크 할머니만은 할머니가 둘 있어도 나쁠 것 없다고 말해준다. 좋은 할머니가 둘이나 있는 안디는 행복하다.




또래들끼리는 할 수 없는 체험의 지지대가 부러운 안디는 상상으로 결핍을 채워나간다.

사과나무 할머니는 안디의 소년다운 상상과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절대 능력자이다. 반면 이웃의 핑크 할머니는 외모부터 평범한 노인이다. 사과나무 할머니에게 개인적 욕망을 투영하던 안디는 다리가 불편한 핑크 할머니를 도우며 ‘주고받는 감정’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


사과나무 할머니라면 분명 엄청난 식물원 자랑으로 안디를 기죽게 했겠지만, 핑크 할머니는 무릎이 아픈 자신을 대신해 안디가 심어준 꽃화분에 기뻐한다. 사과나무 할머니가 없는 모험에서 안디는 무력하다. 사과나무 할머니의 일방적인 능력은 안디 자신을 ‘부연되는 존재’로 위축시킨다. 반면 핑크 할머니는 아주 작은 도움에도 기뻐하며 일상의 경험들을 안디와 함께 나눈다.

서툴지만 어린이 스스로 가능한, 심지어 누군가에게 건넬 수도 있는 호의는 직접 심은 꽃처럼 유일하다.

무엇보다 핑크 할머니는 모두가 부정한 안디의 ‘상상 속 세계’를 그 자체로 인정해준다. 자신을 ‘평일의 할머니’로 규정함으로써 안디의 세계를 확장시켜준다.



가족이란 개념은 해체당하고 나이만큼의 진짜 어른은 희소한 요즘이다. 현대에 이르러 조부모란 존재는 베이비 시터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만 같다. 때문에 나이를 넘어선 이 둘의 우정은 애틋한 동지 의식이 느껴진다.

안디도 핑크 할머니도 혼자 서있기 다소 버거운 나이이다. 삶의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이들은 아마도 서로의 결핍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 내밀한 우정은 미지의 모험 못지않게 짜릿하고 소중하다.





@출처/ 사과나무 위의 할머니, 미라 로베 (Die Omama Im Apfelbaum, Mira Robe, 1965)

新しい世界の童話シリーズ 35, リンゴの木の上のおばあさ (学習研究社, 1969, 번역 시오야 다로 塩谷太郎, 일러스트 수지 바이겔 Susi Weigel)

중앙문화사 소년소녀 세계수상문학전집 7권, 사과나무 위의 할머니 (중앙문화사, 1979, 번역 이원용, 일러스트 수지 바이겔 Susi Weigel)

사과나무 위에 할머니 (별숲, 2013, 번역 전재민, 일러스트 수지 바이겔)



작가의 이전글 요매변성야화, 어젯밤 지나쳐버린 꿈속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