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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Dec 20. 2018

진남의 크리스마스

나의 오컬트한 일상

베이킹이 취미인 이들은 이해하겠지만 케이크 아이싱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실 딸기는 누구나 올릴 수 있다. 아무렇게나 올려도 꼭대기 장식들은 존재감을 뽐낸다. 때문에 케이크 장식의 첫 번째는 적정한 점도의 크림을 적정한 두께로 윤택하게 발라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현주 작가의 <나의 오컬트한 일상> 중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는 읽을 때마다 아주 멋진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떠오른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정한 윤기가 도는, 애틋함이라는 꼭대기 별로 완성된 이미지가 그려진다. 복고적인 분위기는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통적인 케이크 같은 환상을 충족시켜준다.


에피소드 중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I’ll Be Home for Christmas>는 1960년대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이다. 적산가옥이 등장하기에 본격 백귀야행인가 싶었지만 <소공녀>의 분위기로 전개되는 <제인 에어> 같다. 아무래도 고택이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고딕 로맨스의 분위기도 은근하다. 트릭은 다소 익숙하지만 서간체의 효율성이 팽팽한 몰입을 준다.

북디자인도 정말 예쁘다!




‘진남’이 식모살이를 온 저택 ‘등류당은’ 위풍당당하면서도 내내 황량함이 떠돈다.

이 집에서 외로움을 품은 이는 의지가지없는 진남만이 아니다. 유서 깊은 상류층 집안에서 신체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젊은 주인, 그런 아들을 낳은 고고하다 못해 완고해진 큰 마님, 또 그런 그에게 팔리듯 시집온 아름다운 작은 마님. 젊은 주인 ‘경수’는 가족의 형태를 유지해보려 애쓰지만 자기 안의 불행을 들여다보느라 서로를 바로 보지 않는 그들 사이는 언제나 서늘하다.

척추장애로 등이 굽은 경수의 신장은 일반 성인 남성의 반 정도밖에 안 된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맣고 차분한 눈동자는 누구도 탓하지 않고 무엇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일련의 소동으로 작은 마님이 ‘사라지고’ 경수는 취미인 오디오 제작에 더욱 골몰한다. 하녀인 진남이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이런저런 책을 권해주다 시간을 내어 공부를 시킨다. 진남이 그림에 소질을 보이자 서울에서 미술 재료를 공수해오기도 한다.

큰 마님과 달리 경수는 진남의 몽상을 꾸짖지 않는다. 스스로를 투영한 자기 연민에서 시작된 상냥함일지 몰라도 그녀의 고립감을 이해하고 그녀의 창의력을 발견해 준다.

누군가 본연의 모습을 알아봐 준다는 것은 서로에게 특별해지는 첫 번째 단계일 것이다.

그러나 경수도, 진남도 더 이상 다가서지 않는다. 영민하든 영악하든 그들은 서로가 바라는 형태를 이미 알고 있다. 둘의 일치감은 이 방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진남의 그림솜씨가 제법 늘고 있을 즈음 즐겁게 공부하던 두 사람은 문득 큰 마님의 시선을 느낀다. 허약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아들에게 그녀는 기어코 대를 이어 줄 이를 찾아야겠다. 그게 설령 다른 이의 인생을 그러쥐는 것이라 해도 무슨 상관이랴, 배은망덕한 젊은 계집이든 무지렁이 하녀든.

경수는 자신의 소망이 달릴 곳을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등류당에 다시 괴이한 소동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서로 못 본 척할 수도 없을 만큼 또렷하게.





3인칭으로 요약했지만 이 에피소드의 편지 부분은 당연히 1인칭이다. 서간체라는 형식은 표리 부동한 트릭이 되어준다. 

편지 속 진남은 주디 보다는 레이디 수전의 화법으로 말한다. 진남은 종종 ‘행간’을 이용한다. 사소해 보이는 간격마다 미세한 의도가 나열되어 있다. 때문에 독자가 파악한 로체스터-경수의 모습도 결국 진남의 관점이다.

경수에 대한 그녀의 관점, 진남의 행간이 가리키는 방향은 믿을 수 있는 걸까? 문득문득 기어이 드러나고야 마는 애틋함에 섞인 진심의 무게는 어느 정도인 걸까?

아름다운 문장도 가득하다. 가끔은 너무 쏟아진다 싶지만 공허한 문장은 없다.


..“로체스터 씨는 제인 에어를 보내주지 않았죠. 그랬어야 하는데도.”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씩씩하게 떠난 사람도 가끔은 두고 온 것을 돌아볼 때가 있다. 아니, 늘 마음에 둔 그리움이 있어도 계속 나아가는 삶이 있다. 그런 삶을 선택한 이들은 강한 사람들이리라.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ぼくのミステリな日常, 若竹七海, 1991>을 위시한 일본풍 일상 미스터리 혹은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Listerdale Mystery, Agatha Christie, 1934>류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스푼쯤 더 즐거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오컬트는 소재로서 거들뿐 <나의 오컬트한 일상>은 엇갈리는 관계를 관찰한다. 날렵한 실크 스커트를 사랑하는 화자 재인의 시선은 날카롭지만 냉랭하진 않다. 어떤 대상이든 품위의 평균값을 맞추려 애쓰는 이들이 건네는 위로는 살짝 더 기대고 싶어 진다.

다정하지만 거리를 두고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것, 박현주 작가의 진짜 장기인 것 같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는 이들도 잘 접어둔 마음을 슬쩍 풀러 보는 날이 있다.

짧은 조우에도 여전한 지지는 언젠가를 기약하며 다시 떠날 용기를 준다.

그 응원이 사랑이 아닐 리 없다.





@출처/

나의 오컬트한 일상, 박현주, 2017

나의 오컬트한 일상 (엘릭시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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