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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Dec 18. 2018

마르게리트의 크리스마스

마르게리트의 크리스마스


12월은 누구에게나 약간의 쓸쓸함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킨다. 

쓰지도 않을 다이어리를 얻기 위해 스티커를 모으며 술렁거림에 집착하는 것은 사소한 불안에 대한 회피일 거다. 무력한 안주가 지속되기만을 바랄 때 우리는 진짜 노년을 맞는지 모른다.


<마르게리트의 크리스마스>는 최근 읽은 크리스마스 동화 중 가장 인상 깊었다. 작가인 인디아 자르뎅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가 어느 순간 계속 홀로 있으려는 것을 목격한다. 짐작과 달리 할머니가 혼자만의 시간 안에서 충만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새로운 경계에 선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으로 이 동화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동화의 세계에서 노년, 그것도 여성 노년층을 다루었다는 것은 참 의미 깊다. 그 시선이 시혜적이거나 동정적이지 않다는 점도 훌륭하다. 주인공이 밟아나가는 노년의 단계들은 유쾌하다. 늙는다는 게 반가울 리 없지만 좋은 결말이란 대부분 성실한 준비에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성별에 따르는 작은 편견과 위협이 일상을 어떻게 좀먹어 들어가는지도 쉽고 명료하게 보여준다.





남편이 죽은 후로 집 밖에 나서지 않는 ‘마르게리트’를 자식들은 걱정한다. 정작 그녀 자신은 하루하루가 만족스럽다. 다만 조금 더 조심하면 될 일이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면 그뿐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마르게리트는 오직 조용한 저녁을 보내고 싶다.

간편하고 맛있는 도시락을 먹으며 크리스마스 특집 TV 프로그램을 즐기려 한다.


그런데 낯선 방문자가 문을 두드린다.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는 몸을 이끌어 문을 여니 고장 난 차 안에 갇힌 가족이 보였다. 남자는 견인차를 불러야 한다며 전화 사용을 부탁한다. 늦은 밤 홀로인 집안에 낯선 이를 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뜻밖의 곤경을 외면할 수 없다. 잠시 후에는 화장실이 급하다며 아이와 엄마가 함께 문을 두드린다. 카펫을 지저분하게 적시는 아이의 발걸음은 분명 급해 보인다.

나이와 상관없는 방문자에 대한 공포,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니 본인의 자식이 본인에게만 예쁨을 기억해야 하는 건 어린이가 아니라 부모임을 잊지 말자.


평온한 저녁을 찔끔찔끔 방해하던 그들이 돌아간 후 이제사 계획대로 저녁을 보내보려 한다. 그런데 어쩐지 자꾸 창 밖이 신경 쓰인다. 커튼 틈으로 엿보니, 아니 추리해보니 시동이 나가 싸늘한 차가 보인다. 문득 그들에게 도움을 보태고 싶다. 졸음에 겨운 몸에 한 겹 한 겹 옷을 덧대 입고 부츠를 신는다.

정말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선 마르게리트가 마주한 건 불의를 사고를 당한 가족이었을까?





번역된 단행본은 국내 정서에 맞추기 위함인지 제목에 굳이 ‘할머니’라는 명칭을 붙여 넣었다. 그다지 좋은 선택 같지는 않다. 여느 동화처럼 어린 또래들이 주인공이겠거니 책을 펼쳤다가 뜻밖에 나이 많은 여성일 때 느껴지는 전환의 즐거움을 앗아간다.

라가치 수상이라는 부연 없이도 파스칼 블랑세는 고독과 성찰을 탁월하게 빛과 그림자로 치환한다. 무성 영화 같은 분위기는 빈티지 애니메이션 느낌마저 든다.


멋진 작품이지만 약점도 하나 있다. 주인공은 미국의 중산층 노인이다. 거대한 저택과 주 단위로 와주는 도우미, 특별한 시즌들을 챙길 수 있는 취향과 재력이 이미 완성된 주인공이다. 고통을 전시하는 이들만이 주인공일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분명 마르게리트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너절하고 남루한 노년을 목격하는 게 훨씬 쉬운 나라에 산다면 말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누구도 피할 수 없듯 존재론적 고민은 누구에게도 가볍지 않다. 삶의 비대함, 모호한 불안은 절대 극복될 수 없다. 노년의 입구에 서면 살아온 날만큼의 지난함만 남은 것 아닐까 두려워질 것이다.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는 작은 시도만이 그 두려움을 다독여 그제야 한 걸음 뗄 수 있다.


유행어처럼 퍼지는 ‘어르신’이라는 명칭은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자존감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기필코 대접받고 말겠다는 징그러운 의지가 먼저 비치기 때문이다. ‘어르신’이라는 명칭에 집착하는 이들일수록 전혀 어르신 답지 않은 이들인 경우를 목격한다. 

뻔뻔한 젊은이의 시기를 지나온 나도 명칭에 집착하는 노년이 되는 걸까? 인간 무엇일까, 점점 두렵다.


어릴 때는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우울해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로 우울해진다. 둔해진 육체가 바스러지며 도태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다. 마음은 여전히 어제의 날들을 기억하건만 추레한 육신에 갇히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

무언가가 된다는 건 더더욱 어렵겠지만 바닥을 기어 다니며 소멸만 기다리고 싶지 않다.

사소한 품위들을 포기하지 않고 추억팔이보다는 작은 배움들을 쌓고 싶다.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싶다. (가급적 빨리;;) 그런 품위에 도달해보려 애쓰는 자세가 범상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도 ‘삶’이란 명찰을 달아주는 것일 테니까.





@출처/ 

마르게리트의 크리스마스, 인디아 데자르뎅 (Marguerite's Christmas, India Desjardins, 2014, 일러스트 파스칼 블랑세 Pascal Blanchet)

마르게리트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시공주니어, 2018, 번역 이정주, 일러스트 파스칼 블랑세 Pascal Blanch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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