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마음이 난파선 같았다.
그래도 반차 대신 좋아하는 트랙을 한번 더 듣고 만다. 직장인에게 이어폰이란 한시적 동아줄 같은 건지 모른다. 그마저도 쓸 수 없는 직군은 무엇으로 버티는 걸까?
좋아하는 작가, 특히 현역의 작가라면 업데이트를 누리는 즐거움이 있다. <옥상에서 만나요>는 정세랑 작가가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묶은 단편집이다. 다작 작가이긴 해도 크고 작은 에세이까지 빠지지 않고 읽어두었다 생각했는데 정세랑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서 이렇게 솟아나는가 새삼 궁금해진 작품집이다. 여전한 화제의 <웨딩드레스 44>는 물론이고 우리가 바라마지 않지만 이제는 판타지가 되어버린 연애담 <해피 쿠키 이어>, 낙오했어도 실패는 아닌 <알다시피, 은열>, 자매애의 표피를 쓴 품위에 관한 이야기 <이혼 세일> 등 다정하고 단정한 격려들로 가득하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들은 소란스러워도 경박하지 않고 웃기지만 비열하지 않다.
무엇보다 내내 애틋하다. 신열에 지친 몸을 살짝 스치는 서늘한 손마디 같은 상냥함이 배어있다.
빼놓을 것 없는 작품들 사이에서 <옥상에서 만나요>가 표제작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2019년을 사는 여성에게라면 더욱.
유명 스포츠신문 광고사업부 직원이 된 ‘나’의 매일은 구직 때만큼 혹독하다. 업계의 수챗구멍 같은 회사는 달고 신 것으로도 녹일 수 없는 나쁜 생각만 채워준다. (P.90)
내가 63빌딩과 남산타워와 한강의 멋진 트라이앵글 중심으로 뛰어내리지 않은 것은 각각 다른 부서에서 같은 절망감을 공유하는 회사 ‘언니들’ 덕분이다. 틈 날 때마다 모이는 옥상의 실외기 위에서, 운명의 마녀들 같은 세 언니는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인 채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함께 고민해주었다. (P.95)
그런 언니들이 조밀한 간격으로 결혼을 하며 더러운 실외기에는 나만 남게 된다. 취집인가 싶던 언니들의 선택은 남편들을 만나보자 아리송해진다. 형사까지는 그렇다 쳐도 장구돌이를 만나는 게 어디 그렇게 평범한가 말이다.
그러나 어딘가 윤기 도는 그녀들은 옥상에 함께 모여있을 때보다 근소하게라도 나아졌기에 나는 절박하게 비결을 묻는다.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규중조녀비서>라는 어이없는 주술책이다. 21세기 이건만 언니들의 단호한 정색에 나는 진지하게 소환진을 준비한다.
그렇게 불러낸 ‘나의 남편’은 형사도 장구돌이도 아니었다. 너울 같은 그는 뜻밖에 진짜 내 운명의 상대임을 증명해낸다.
원초적 명제 앞에 직업윤리란 무엇일까?
일을 하다 보면 ‘어떤 노선’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자의와 무관한 그런 요구들을 일단 매뉴얼로 부르기로 하자. 최소 비겁한 일일 테지만 집행하는 나에겐 피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망설인다. 이 목표가 견인할 목적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가치는 무형의 것이지만 우리의 동기는 실체로부터 온다.
고만고만한 직장인, 특히 여성이라면 <옥상에서 만나요>의 언니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것이다.
모든 언니들이 반드시 좋지는 않다. 누구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럴 리 없다. 오히려 조직 아래 꾸려지는 그룹은 대체로 스스로의 비열함에는 관대하다. 그런 그룹이 공유하는 이미지는 수순처럼 유사 폭력이 된다.
분노와 낙오를 함께 하면서도 매번 사심 없는 격려 또한 잊지 않는 이들은 정말 희소하다. 범상해 보이지만 우주의 기운이 도와야 얻어지는, 그마저도 한 시기만 스쳐 지나는 확률의 관계다.
<옥상에서 만나요>의 가장 멋진 점은 언니들로 인해 한 시기를 견뎌낸 내가 누군가의 언니로 설 수 있다는 점이다. 안이한 위로 대신 시도를 독려한다. 대책 없이 맞닥뜨린 세계 앞의 개인이 그 대책 없음을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그린다. 그 응원이 되려 가장 큰 위로로 돌아오는 작품이다.
어느 봄엔가 친구였을 동료와 서로 오늘치 불행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녀가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들었을 때 소음 속에 잦아드는 노래가 익숙했다.
“<이사분기> 좋아.”
“미쳤어?! 너무 싫어!!! 감사까지 온다!”
내가 말한 것은 한없이 무른 봄노래 제목이었는데 그녀는 일 년 중 가장 소름 돋는 시기를 떠올렸었다.
지금도 뭐 오락가락하지만 그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하루는 너무 길었고 노래는 저 혼자 봄이었다.
담배라면 성별불문 치가 떨렸지만 한 줌이라도 시간이 허락되면 옥상으로, 주차장으로 햇빛 아래 흡연자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모여서 하는 것이라야 대부분 시시했지만 많이 웃었다.
혼자 곱씹는 분노는 끈적해지지만 함께 하는 분노는 휘발되었다.
그렇게 습관 같은 불행 전시와 자조로 오늘의 바보짓을 틀어막았던 것 같다.
행운은 시간에 밀착되어 진가를 드러낸다. 너무 늦게 도착하면 회한이 되고 만다.
두터운 먼지 속 오후의 그녀가 정세랑의 언니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쓸쓸한 실외기 밑에 잠복해있던 우주의 기운이 파티션 사이를 헤치고 올라와 숨 가쁜 그녀의 무표정을 지워주었으면 싶다.
매번 한 주 늦은 별자리점 같은 날들 사이에서 나락처럼 가냘픈 그것이.
@출처/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창비, 2018)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36437534
페퍼톤스, Beginner’s Luck,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