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과 존, 데일 펙과 박희정
연애가 뭘까? 몇 번을 복기해봐도 지루하지 않은 사소함, 알면서도 모르겠는 대답들, 어제 내내 설레었지만 오늘 아침 이유 없이 사그라드는 마음.
이 아슬아슬함은 어디에 도착해야 완성되었다 할 수 있을까?
입소문으로 만나게 되는 책들이 있다. 감흥이 몸집을 불려 장르가 되거나 뒤늦은 인지로 곱씹어보는 그런 책들. 데일 펙의 소설은 후자의 책이었다. 박희정 작가가 그린 동명의 만화 <마틴 앤 존>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같은 제목을 가진 두 작품은 서로 닮아있을 것 같지만 불안정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오랜 연인에게서 문득 발견한 낯선 인상처럼.
데일 펙의 데뷔작 <마틴과 존>은 동인 앤솔로지를 통해 알게 된 책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퀴어 로맨스의 클리셰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감각에 의존한 서사가 특정한 시기에 매혹적일 소설이란 생각도 든다.
수록분 중에선 <변모>와 <바다의 끝>이 인기 높지만 이 단편집은 전체가 하나의 이미지 같다. 수록된 단편들은 각각의 작품이면서 연결된 에피소드로 볼 수 있다. 섬세하게 시각화된 문장에 비해 인과는 모호하다. 이런 표리 부동함에선 자기 방어와 자기 고백이 동시에 느껴진다.
매번 다른 배경의 연극 같은 설정 속을 역시 같으면서 다른 ‘마틴과 존’이 드나든다. 그들은 부서진 일부가 섞여 들어간 듯 흩어진 기억 사이를 떠돈다. 혼탁했다 맑았다 찰랑거리다 우르르 쏟아지는 감정의 파고 속을 끊임없이 부유한다.
박희정의 ‘마틴과 존’도 매번 다른 설정 속에 한결같이 지순하다. 과거와 현대, 이계나 우주 등 만화가 가진 장르적 장점은 알뜰하게 활용된다.
섹슈얼한 요소를 떠나 미디어에서 다루는 ‘브로맨스’는 대부분 지루하다. 트리거를 피해 특정 서사만 쏙 빼와 유사연애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이미 질렸음에도 브로맨스를 가장한 퀴어 베이팅은 여전하다. 박희정의 <마틴 앤 존>이 이런 함정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풍만큼 섬세하고 애틋한 로맨스는 포르노적 전시로 쓰이지 않는다.
줄거리가 무의미하지만 데일 펙 단편집의 전반부 <여기 이 아이>, <마르지 않은 청색 칠 주의하시오>, <바다의 시작>은 화자가 정체성을 자각하고 필연적으로 가부장제와 불화하는 과정이 담담히 고백된다.
이 에피소드 속 아버지들은 외형적으로 강한 남성성을 과시한다. 직업마저 자수성가한 공사 노동자 등이다. 이들은 강압적인 종속을 통해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려 든다. 근육병으로 출산이 불가한 아내에게 끝없이 임신을 시도하고 어린아이 옆에서 모욕적인 성관계를 종용하며 외도는 일상이다.
이들이 규정한 가정은 폭력의 발원지가 된다. 비어트리스와 헨리로 대표되는 이성애 커플의 사랑은 자기 파괴적이다. 아이는 아버지를 필요로 하면서도 수순처럼 증오한다. 그를 증오하기에 남성성을 부정하는지, 자신이 남성성 쪽에 서있지 않음을 자각하기에 그를 증오하는지 아이는 아직 혼란스럽다.
나의 첫 연인이었던 헨리는 백발에 살집 좋은 친절한 남자였는데, 마을에서 쫓겨났다. 이곳 사람들은 법정이나 교도소를 이용하는 대신에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들은 누군가를 해고하고, 그의 수표를 받아주지 않고, 마을의 유일한 식료품 가게에서 그에게 먹을거리를 팔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 세 명의 야경꾼
나는 수전에게 임신이란 어떤 거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말했다. 네 몸 깊은 곳에서 성기가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게 그 사람의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의 일부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 거야. 이윽고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그 존재를, 독립적인 생명을 형성해 가는 걸 넌 상상할 수 있어? 이것이 내가 상상하던 임신이었다.
나는 수전에게 이 생각이 무리 없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전혀. 전혀 그렇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 빌어먹을 녀석, 마틴
소수자로서의 남성은 잠재된 사회적 폭력을 의식한다. <세 명의 야경꾼>에선 타인에게 자행되는 커뮤니티의 폭력에 중첩되는 피로와 불안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소수자 남성들도 생리학적 성별 앞에선 무지한 기득권자가 된다. <빌어먹을 녀석, 마틴>에서 임신에 관한 존의 질문은 현란하게 포장된 로망이다. 여성인 수전은 존의 무지한 피상을 단호히 부정한다.
한정적 에피소드이긴 해도 데일 펙은 게이 감수성을 여성성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박희정의 <마틴 앤 존>은 완결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완결되었다. <호텔 아프리카>에서 이어지는 연재 초반의 날카롭고 섬세한 화풍은 특히 사랑받았다. 극강의 아름다운 펜선이 스프레드로 펼쳐진 <나인> 연재분 첫 회에 가슴 두근거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종착지가 다소 범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초반부의 아찔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워낙 수려한 데생의 작가지만 연재 시기가 있다 보니 양감과 텍스처 중심으로 변화한 후반기 화풍은 다소 호불호가 갈렸다.
박희정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데일 펙과의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빌어먹을 녀석, 마틴>과 <내 인생을 둘로 나눈다>의 분위기가 흐르는 첫 회차 연재분은 데일 펙의 에피소드를 꽤 성공적으로 오마쥬 하지만 이미지 차용에 그친다. 데일 펙이 복구되지 않는 상실을 하염없이 목도하고 있다면 박희정은 그럼에도 어딘가 분명.. 이란 희망으로 마무리한다. 박희정의 오마쥬는 대중적 BL코드를 내포한 애틋한 로맨스로 소비된다. 어쩔 수 없이 데일 펙 보다 좀 더 따뜻하고 피상적이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실험하고 있었고, 그리고 우리는 실패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사랑이 없었다면 사랑을 실험하는 일이 더 쉬웠을지 누가 알겠는가. 분명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우리는 그 자체가 대화인, 또는 말이 필요 없게 만드는 많은 것들을 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빌어먹을 녀석, 마틴
비를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고, 행여 시들 새라 애를 태우고, 심장이 먼저 알아채버린 그 마음 때문에 슬프고.. 조바심 나고.. 아프고.. - 마틴 앤 존 7권
완벽한 일치의 순간만이 유일하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온전히 태워버리고 말까? 그래도..라는 낙관을 품은 채 다음 춤을 기다릴까? 대부분의 마틴과 존은 스쳐 지나갔으며 기억 속에서만 반짝거린다. 사랑의 영속성은 박제된 시간에서만 가능하다는 듯이.
결국 아무나 사랑하게 되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는 진부한 서사만 남는 건지 모른다.
@출처/
Martin and John, 박희정
마틴 앤 존 1-12 (서울문화사, 2006-2010)
Martin and John, Dale Peck, 1993
마틴과 존 (민음사, 2008, 번역 서창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