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전사 轉寫
멋진 책들은 어떤 계절에도 한결같다. 그럼에도 계절로 인해 특정한 환기를 소환하는 작품들이 있다.
뼈가 녹아내릴 듯 눅진한 한여름 밤에 읽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처럼.
내가 처음 읽었던 뒤라스의 작품은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hima mon amour, 1960>이었다. 알랭 레네의 영화를 보기 훨씬 전이었음에도 땀방울 어린 연인의 등이 생생히 만져지는 문장이었다.
사랑이, 회환이 뭔지도 모르는 나이에 먹구름 같은 몰입이 다가왔다.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과 스물다섯 살 사이에 내 얼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메콩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고, 그 나라에는 계절이 없었다.
우리는 오직 한철뿐인, 무덥고 단조로운 계절에 묻혀있었다.
봄도 없고, 봄소식도 없는 지구의 긴 열사 지대에 살고 있었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령(인도차이나)이던 시기, 메콩강을 지나는 배에서 한 소녀가 중국인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남성용 중절모와 거친 생사 원피스, 하이힐, 짙은 립스틱의 백인 소녀. 이미 자신의 ‘기질’을 자각하고 있는 그녀는 세상과 불화할 준비도 되어있다.
가난과 절망으로 미쳐가는 어머니, 폭력적인 큰오빠, 그 폭력에 노출되어 말라가는 사랑하는 작은 오빠. 그녀는 ‘무엇에 도달하기보다 지금 있는 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P.32) 그러나 아직 어린 그녀가 관습에 반항하는 방식은 나이에 맞지 않는 착장 정도다.
엉켜 드는 반항심과 호기심 속에 중국인 남자와 관계한 그녀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자유로움을 느낀다. 각자의 현실에서 도피한 둘은 ‘봄도 없고, 봄소식도 없는 무덥고 단조로운 계절(P.11)’속에 서로에게 몰두한다.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다가 애늙은이가 되는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우리 형제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배고프지 않았다. 우리는 백인 아이들이었다. 창피함을 느끼며 가재도구를 팔곤 했으나 배고프지는 않았다. 심부름꾼도 있었다.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 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무엇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절망 그 자체라면 큰 오빠는 폭력과 혐오다.
그녀는 돈을 주고 사는 여자처럼 대하길 요구하며 거리를 두지만, 남자는 이미 그녀에게 예속된 자신을 깨닫는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이런 교제는 곧 추문이 된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방치한다. 중국인 연인에게 얻을 수 있는 금전 때문이다.
중국인 연인은 정상적인 교제를 시도해보려 그녀의 가족을 초대한다. 값비싼 식당에서 그녀의 가족들은 끊임없이 먹어치우며 돈을 써댈 뿐 중국인 연인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공개적인 모멸을 준다. 예의 바른, 자신의 커뮤니티에서 상류층일 그가 중국인이기에 백인들은 당당하게 잔인하다. 그녀의 가족들은 아사 직전의 하층민임에도 자신들이 모종의 권리에 당당하다 여긴다. 바람마저 황색인 이곳에서 그들은 백인이니까.
나이, 환경, 인종의 차이는 진부함만큼 견고하다.
거리에는 살아 있는 물결처럼 혼잡함이 모든 방향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중국인 무리는 쫓겨나 방황하는 개들처럼 지저분하고 거지들처럼 맹목적이다. 이제 풍요로운 그들의 모습 속에서도 나는 당시의 이미지를 문득 다시 보곤 한다. 결코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한데 섞여 걷고 있던 그들, 아무런 행복도, 슬픔도, 호기심도 없이 혼잡한 무리 속에서 각자 홀로 있는 것 같은 표정들. 어딘가 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갈 계획도 없어 보이면서 다만 어슬렁거리기 위해 걷고 있는 것 같은 그들. 혼자인 동시에 무리에 끼어있고, 항상 모여 있으면서 절대로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그러면서도 늘 무리 속에서 고립된 존재들로 있는 그들.
먼지 가득한 메콩강, 밀회의 콜랑, 눅진 열기 가득한 아열대의 밤.. 그녀와 그를 스쳐가는 배경은 이국적인 풍광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추문의 한가운데를 곧바로 걷는 그녀와 그의 뒤로 지치고 염세적인 군상이 일렁인다. 이름도 형체도 모호한 군상 위로 뒤라스가 목격한 식민지의 열패감과 소외의 정서가 중첩된다. 중국인 연인에게 쏟아진 잔인함은 당시 유럽 제국주의의 오만함과 야만성이 그대로 비친다.
그녀는 그토록 혐오하는 큰 오빠의 광기를 전쟁에 몰두한 제국, 그 일원일 자신의 불온함과 동일시한다.
울면서 그는 그것을 한다. 처음에는 고통이다. 그다음에는 고통이 사그라지면서 변해간다. 천천히 고통에서 빠져나와 쾌락으로 빨려 들어가 향락을 즐긴다.
형체가 없는 바다, 비길 데 조차 없는 그 바다.
우리는 독신자 아파트로 돌아온다. 우리는 연인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우리는 항아리에 담긴 차가운 물로 함께 목욕했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사랑은 아직도 죽고 싶을 만큼 열렬했고, 그것은 이제 위로할 길 없는 희열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빗대어서 밖에는 표현하지 못한다. 두려움을 넘어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곧잘 운다. 그의 영웅심, 그것은 바로 나이고, 그의 노예근성,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다.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녀는 자신 역시 이 혐오스러운 가족-백인의 일부로 규정함으로써 그에 대한 사랑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둘만의 방으로 돌아온 그들은 새삼 얼마나 진부하고 불가능한 사랑에 빠졌는지 깨닫는다.
사랑은 절망이 더해져 열락이 된다.
그러나 그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서로의 본질도 기질도.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울었다. 그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이었고, 또 이런 종류의 연인들은 눈물을 흘려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검은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쇼팽의 음악이 큰소리로 울려 퍼졌을 때,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은 어두운 여객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그 음악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진부하게 예정된 이별을 그들은 덤덤히 받아들인다. 귀향하던 배 위에 쇼팽의 왈츠가 울려 퍼지던 어느 날 밤, 그녀는 문득 깨닫는다. 그토록 그를 상처 입히고 부정했던 것이 그녀 방식의 사랑이었다는 걸.
그 작은 사실 하나를 인정한 지금, 모래처럼 흘러내린 시간 속에 이미 그 사랑을 잃었다는 걸.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십수 년이 지나 성공한 작가가 된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영화에선 흰 눈이 끝없이 날리는 계절이다. 그의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챈 그녀는 그가 간직해온 마음을 입 밖에 내기도 전 알았을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위악으로 버티다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어린아이들. 그는 그 상실 속에 자신을 묻어버렸지만 그녀는 그 상실을 딛고 떠나왔다.
그녀가 새로운 세계로 날아간 자리에서 그는 내내 한 시기만을 응시한다.
우리는 불멸성이 바로 육신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 작은 오빠의 육신은 죽었다. 그의 불멸성도 그와 함께 죽었다. 불멸성이 깃들었던 육체가 사라진 지금, 그의 불멸성 없이도, 이렇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
<연인>은 여성 혐오적인 작품일까? 주인공을 소아성애자와 미성년자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 작품을 오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뒤라스의 <연인>은 시간과 불멸에 관한 이야기다.
서사를 이끄는 로맨스로 포장된 감각, 찰나의 순간들은 집요하게 묘사되다 흩어져 버린다. 초겨울 눈발처럼 회환도 없이. 그는 왜 그녀를 사랑했을까? 불가함이 그토록 오랜 사랑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오랜 응시만으로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녀는 모든 타자-폭력적인 가족, 백인 계급사회, 인종주의에 반발한다. 관습에 순응할 수 없는, 그렇다고 스스로를 망가뜨릴 생각도 없는 자신의 기질을 자각하자 철저하게 욕망을 고수한다.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움켜쥐고 있는 이 기질에 그는 홀리고 만다.
뒤라스는 평생을 걸쳐 인위적 억압에 대한 반발을 드러냈다. 다소 중구난방적인 뒤라스의 정치 노선도 자기 내부에 충실한 반발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껍데기로 살아가던 그에게 그녀는 땀과 체취로 실재하는 육체를 넘어선다. 유일하게 살아있던 시간을 온전하게 보존할 방법은 스스로를 시간 속에 박제하는 것뿐이다. 위악에도 그녀는 그를 타자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간 속에 자신을 묻지 않는다. 그 시간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뒤라스의 <연인>은 문장들은 내밀하고 생명력 넘친다. 짧은 분량에도 끝없이 곱씹게 된다.
영화에 힘입어 이 작품은 제법 많은 번역본이 발행되었지만 현재 선택의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민음사의 <연인>은 무척 오래도록 되풀이해 읽어 온 번역본인데 오역과 초월 번역이 난무하다는 평에 원서를 찾아보았다. 하찮은 불어 실력에 원전 대신 찾아본 영서는 Barbara Bray의 1998년 영문 번역판이다.
하지만 익숙해져선지 민음사 판본도 무척 좋아한다. 다만 뒤라스의 개인사에 대입해 이 작품을 프로이트론으로 해석한 것은 너무 나태한 해설이라 생각한다.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본문에 물리게 등장하는 ‘젖가슴’이란 표현만큼 식상하다. (이 표현 때문에 번역자가 남성이겠거니 했다.)
“잘 빠져봐야 아웃 오브 아프리카겠지.”
<연인>의 영화화를 두고 뒤라스는 냉소했다. 영화의 정서는 일정 부분 그녀의 예언이 맞아 들었다. 애틋한 정서에도 고착된 이미지로 남은 영화와 달리 뒤라스의 문장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매해 오지만 전혀 같지 않은 계절처럼, 모호하게 윤색된 기억 속에 반추해 보는 지긋지긋한 한 여름 더위처럼 말이다.
@출처/
L'Amant, Marguerite Duras, 1984
The Lover (Random House, 1998, 번역 Barbara Bray)
연인 (민음사, 2007, 번역 김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