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천국에 계시니 세상 모든 것이 바르도다.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유년 시절의 마지막을 마주한 빨강 머리 앤은 브라우닝의 시에서 미래를 긍정한다. 모퉁이를 돌면 기다리고 있을, 이제처럼 예기치 못한 변곡점을 담담히 맞이하려 한다. 하지만 현실의 모퉁이는 대개 사고가 기다린다. 자전거로 퇴근하던 니시다도 어느 날 모퉁이에서 과거의 경고문을 맞닥뜨린다.
마스다 타다노리가 그리는 악몽은 서늘함조차 익숙하다. 악의와 방관이 축제처럼 전이되는 군중심리를 그린 <매그놀리아 거리, 흐림>, 여성이라면 국적불문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공포 <밤에 깨어나>, 다소 소설적 설정이지만 스스로 함몰된 작은 괴물에 관한 목격담 <계단실의 여왕>은 자신이 괴물인 줄도 모르는 괴물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수록분 중 <복수의 꽃은 시들지 않는다>를 박연선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문장을 빌어 요약한다면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지푸라기 하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차곡차곡 쌓여온 무게에 신음하던 낙타가 마지막으로 떨어진 지푸라기의 무게로 쓰러지는 순간 지푸라기는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것일까? 마침 맞아떨어졌을 뿐 지푸라기의 무게는 무용할 뿐일까?
같은 질문을 마스다 타다노리는 선잠 속 악몽처럼 그려내고 있다.
‘사와이’는 평범하고 무난한 직장인이다. 그런데 최근 그의 일상에 평범하지 않은 기운이 번져 든다. 우연으로 치부한 사소한 불운들이 아내를 거쳐 아들을 덮치자 그는 인정하게 되고 만다. 이 불운들은 이십 년도 전에 예고받았음을, 그것도 그 자신이 스스로 산 원한으로부터 말이다.
고등학생 시절 사와이는 평소 친분 있던 ‘니시다’로부터 사소한 부탁을 받았다. 니시다는 패거리들과 유흥비 마련을 위한 자작 절도극을 꾸민다. 들통나더라도 그간 지속적으로 괴롭혀 온 ‘하야카와’에게 덮어 씌우면 그만이다. 자작극의 리얼리티를 위해 사소한 루머를 흘려주는 것이 사와이의 역할이었다. 용돈벌이 겸 사와이는 니시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쏠쏠한 제안을 누군가는 수락할 것이고 자신은 살짝 거들뿐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야카와는, 허약하고 흐릿한 인상의 그 아이는 어차피 왕따니까.
니시다의 자작극은 들통나 학생의 일탈로 마무리되지만 하야카와에게 누명을 씌우는데 만은 성공한다. 수년간 괴롭힘 당하다 억지로 가담한 범죄의 불명예까지 혼자 덮어쓴 하야카와는 목을 매 자살한다. 유서조차 없이. 사와이와 니시다는 내막을 모르는 부모들에게 떠밀려 조문에 나선다. 외아들을 잃고 이미 무너진 하야카와의 어머니를 대신해 응대하는 이는 외삼촌이다. 차분한, 그래서 더욱 불길한 분위기의 이 사나이는 어린 그들에게 담담히 말한다. 자식처럼 사랑한 조카 하야카와의 가해자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사내는 둘을 응시하며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없어졌을 때, 그러나 너희가 지켜야 할 것이 생겼을 때 반드시 빼앗으러 가겠다고 선언한다.
아들의 사고 이후 니시다에게 연락해 본 사와이는 깨닫는다. 의식적으로 묻어두고 산 그날의 선언이 도착한 것임을. 복수의 전조는 니시다에게도 이미 도착해 있었고 그들은 스스로 건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 팽팽해진다. 하야카와의 외삼촌이 최후에 심판받을 자로 지목한 이는 누구일까?
범죄의 피해자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가늠할 수도 감히 단정 지을 수도 없지만 모든 크고 작은 약자의 입장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무력함이 아닐까?
범죄가 남긴 물리적인 가해는 사실 일 순위가 아닐지 모른다. 그때 왜 그곳에 있었을까? 내가 무엇에 소홀했던 거지? 반복되는 복기는 스스로를 부당한 자기 검열로 몰아세운다. 때로는 자신이 지옥 속에 있는 줄도 모르는 피해자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의 지옥에 절여진다. 간혹 어떤 모색도 포기한 채 홀로 복수를 도모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이들의 어떤 부분은 망가져버렸다.
가해의 경중이란 것이 과연 타당할까? 아이와 동물이 대상일 때 더 엄중해야 할 뿐 약자를 지정한 가해는 어느 것도 가볍지 않다. 미수가 의도를 덮을 수 없으며 폭력에겐 잊혀질 권리가 없다.
사법 정의가 난무할 때 세상은 지옥이 된다. 그러나 법이, 정의가, 상식이 우리를 배반하고 지켜줄 의지 따윈 없을 때 우리는 사법 정의를 욕망해본다. 사법정의를 통한 복수가 후련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이 욕망의 본질은 가해자가 또한 무간지옥에 빠지기를, 그 영겁의 시간에 시달리기 바라는 자해에 가깝다.
악은 편하고 거침없고 선, 아니 준법은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공정함을 요구받고 억울하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이, 피해자 곁에 선 사람들이 실현 여부를 떠나 사법정의를 섣불리 수행하지 않는 것은 최소한의 품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능이 있고, 품위가 있고, 수치심과 이타심을 잃지 않으려 애씀으로써 인간으로 정의된다.
뉴스는 언제나 지옥 같은 이슈가 넘쳐나지만 폭력과 죽음은 여전히 가속 중이다. 어떤 어린이, 어떤 여성, 어떤 노동자에겐 사랑과 용서의 계절이 여전히 도착하지 않는다. 누구나 크고 작은 억울함을 겪는다. 그러나 진짜 범죄의 피해자가 된 이들에겐 걸어가야 할 길만 있을 뿐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기 마련이다.
당신이 겪은 피해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란 걸 단언한다. 그저 너무 운이 나빴다고, 알 수는 없지만 하필 당신이 뒤집어쓴 불운은 전적으로 우연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또 같은 이유로 가해자들에게 말한다.
자신이 가해자인 줄도 모르는 지능 떨어지는 2차 가해자들에게도.
권선징악 같은 건 어차피 신기루이니 너희는 여전히 희희낙락하게 그 꼬라지로 살아갈 거라고.
그럼에도 확신한다. 피해자의 불운에 어떤 이유도 없었듯 불운은 너 또한 기다린다. 그 불운조차 우연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사필귀정이라 부를 것이다.
그 야만이 너에게 바싹 달려들어 비리고 뜨거운 구취를 발라대는 바로 그때, 네가 행한 야만을 떠올리길.
그것이 피해자들이 원하는 온도의 복수일 것이다.
범죄자들이여, 모퉁이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출처/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복수의 꽃은 시들지 않는다, 마스다 타다노리 (三つの悪夢と階段室の女王; 復讐の花は枯れない, 增田忠則, 2017)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복수의 꽃은 시들지 않는다 (한겨레, 2019, 번역 김은모)
@인용/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지푸라기 하나 (얼렁뚱땅 흥신소/청춘시대, 박연선)
***복수는 차가울수록 맛있는 법이지 (대부, 마리오 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