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미도르 / 신들은 목마르다
원전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은 작품을 만나면 서로 다른 언어가 징벌이란 것에 동의하게 된다. 아나톨 프랑스도 명성에 비해 국내 번역본이 귀한 작가다. 드레퓌스 사건에서나 언급되는 이 작가는 신랄한 냉소를 구사해 왔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문학적 엄숙주의에 경도된 지루한 문장들은 아니다. 오히려 특유의 냉소와 회의가 경쾌한 리듬을 만든다.
<펭귄의 섬 Île des Pingouins, 1921> 보다는 건조했지만 몇 년 전 완역본이 나온 <신들은 목마르다 Les dieux ont soif, 1912>도 명료함으로 반짝인다. 대혁명 이후로도 일상의 비루함은 달라지지 않았고 혁명의 가치는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가에 따라 부표처럼 떠내려간다.
대혁명을 숭배하던 가난한 화가 ‘가믈랭’은 우연한 기회에 승승장구 중인 혁명 정부에 선택된다. 혁명의 가치를 엄중하게 수호하려는 그의 순수한 열정은 점점 자기도취로 변한다. 굳은 신념은 광기로 치닫기 쉬운 법, 어려운 형편에서도 연민을 잊지 않던 수줍은 청년은 무고한 희생도 개의치 않는 괴물이 된다. 주위의 모든 것을 제물로 불사르던 그는 그 자신도 제물이 된다.
<신들은 목마르다>는 읽는 내내 김혜린 작가의 <테르미도르>가 떠오르게 했다. 내가 읽은 판본은 2011년 발간되었기에 시기상 나는 <테르미도르>를 먼저 읽은 셈이다. 대혁명에 관한 이 두 개의 변주곡은 비슷한 배경 아래 (대혁명 이후 마라 암살, 로베스피에르 공포정치 기간) 역사가 개입하여 운명이 바뀌는 주인공들을 그린다. 그러나 파국의 종착지는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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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성공한 전작 <비천무>로 인해 <테르미도르>는 연재 초반 배경만 달리 한 자기 복제에 그치는 것 아닐까 싶었다. 운명조차 뛰어넘는 사랑을 그린 전작과 달리 <테르미도르>는 운명 안에서 소모되 버리는 신념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품마다 외유내강의 여성상을 선보인 김혜린의 여주인공 중 알뤼느는 다분히 세속적이다. 그녀의 정치 스파이 활동은 신념이 아닌 계급의식에 충실해 선택한 최선이다. 하지만 ‘힘든 첩보활동 속에서도 무도회 같은 사교활동이 즐겁기도 했던’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모순과 위선을 스스로 깨우쳐간다.
알뤼느의 이런 자각은 혁명의 집행자인 유제니나 이상주의자 줄르의 좌절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알뤼느의 자각은 그저 개인적 모럴의 미미한 변화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작은 의지들이 연대할 때 비로소 변화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역설한다.
또 스스로를 불사르는 선택이 유일한 이들을 보면 ‘자유’라는 피상적인 가치가 얼마나 많은 희생 아래 얻어진 것인지 곱씹을 수밖에 없다.
진리를 구했다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잔혹함을 정당화하는 가믈랭, 순결한 이상은 있어도 순결한 폭력은 없으므로 파국 또한 받아들이는 유제니. 우연의 역사 안에서 똑같이 신들의 제물이 된 이들은 서로 다른 선택으로 자신의 신념을 정의한다. 그들은 자기 연민에 물든 광신도와 독립적 주체로 죽는 발원자로 갈라진다.
무위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혁명 후 일상은 더욱 더디게 흘러간다. 여전히 제물에 목마른 신들은 광기에 물든 가믈랭뿐만 아니라 광기를 거부한 유제니도 거둬들였다. 그러나 스스로의 자각으로 이루어진 연대로 유제니의 희생은 무의미하지 않다.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움직인다.
김혜린 작가는 대표작을 꼽는 게 무의미할 만큼 고른 수준의 역사극을 발표해 왔다. 데뷔작 <북해의 별>에선 가상 국가를 배경으로 이상적인 혁명을, <비천무>에서는 대의명분의 소모품으로 버려지는 허상의 혁명을 그렸다. <테르미도르>의 혁명은 변질된 가치 속에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끝내 제물로 삼기에 김혜린의 작품 중에서도 쓸쓸하다. 다소 영웅주의에 기댔지만 희망을 말한 <불의 검>을 지나면 아마도 만화판 <토지>가 되었을 미완작 <광야>의 혁명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묵직한 주제 의식에도 <테르미도르>는 ‘순정’이란 명칭에 부합하는 섬세한 화풍을 구사한다.
여백을 통한 서정적인 서사 배치는 전면을 활용한 큰 판형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유제니의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면 이 작품이 이 장면을 위해 달려왔음이 느껴지는 시각적 쾌감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가급적 책을 구해 읽기를 권한다. 워낙 인기작이었기에 중고 애장판도 구하기 어려운 편은 아니다.
20세기 초반과 후반의 작품에서 같은 공감을 읽는 21세기의 나. 사회 수준 전반이 과거로 회기 하는 것 같은 요즘을 보면 어쩐지 가장 낙후된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은 나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출처/
테르미도르, 김혜린
월간 르네상스, 테르미도르 (서화 1988.11-1990.5)
테르미도르 (대원씨아이, 1998)
목마른 제신, 아나톨 프랑스 (Les Dieux ont Soif, Anatole France, 1912)
신들은 목마르다 (뿌리와 이파리, 번역 김지혜,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