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연인들의 행복한 결말은 누군가의 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잊혀졌거나 그림자 속에 잠겼다 해서 그 마음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사랑에 의미를 구하는 것은 이중으로 서글픈 일이겠지만.
때때로 간절함은 의도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남아 제 나름의 의미로 완성된다. 아나톨 프랑스의 소품 <아베이유 공주> 속 로크 왕도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스스로의 사랑으로 완성시킨다. 자신의 이름처럼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켈트족 신화가 원전인 <아베이유 공주>는 판본도 여러 종류이며 걸출한 일러스트도 많다. 기독교적 계도에도 정작 이 소품이 남기는 잔상은 엇갈리거나 자각하지 못한 마음들이다.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은 로마 교회의 금서 목록에 오를 정도로 당대에선 파격적이었다. 회의의 외피를 둘러쓴 그의 작품은 냉소적인 필체를 도구 삼아 부조리를 응시한다. 그러나 그 시선 이면에는 외면받는 이들을 향한 따뜻한 연민과 변호 또한 스며있다.
금성 전집에는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 <아베이유 공주>, <성모의 곡예사> 두 편이 실려있다.
와카나 케이의 미니멀한 화풍은 요정과 마법이 공존하는 고대 로망스의 신비로움을 고조시킨다.
#테르미도르, 순결한 폭력은 없다 https://brunch.co.kr/@flatb201/27
브란슈란드 가의 차기 영주 ‘조르쥬’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크라리드 가에 의탁한다. 꿀벌의 황금빛 같은 머리카락 때문에 ‘아베이유 Abeille’라 불리는 크라리드가의 공녀와 사이좋게 자라나는 조르쥬. 둘은 영지인들을 수호할 미래의 군주로서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아직은 서로에 대한 감정도 깨닫지 못하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어린아이들일뿐이다.
어느 날 둘은 금지된 구역인 호숫가로 충동적으로 외출한다. 생각보다 고된 산책에 아베이유가 깜박 잠들자 조르쥬는 호숫가를 둘러본다. 그 순간 조르쥬는 물의 요정 운디네에게 붙들려 ‘호수의 여왕’에게로, 아베이유는 난쟁이들에게 붙들려 지하세계로 끌려가 헤어지게 된다.
난쟁이의 왕 ‘로크’의 배려로 아베이유는 여러 가지 교양을 익히며 아름답게 성장한다. 현명하고 다정한 로크 왕은 여러모로 세심하게 마음 써주지만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부탁만은 들어주지 않는다. 성인이 된 공주에게 로크는 원하는 보석은 무엇이든 가져도 좋다고 말한다.
“임금님, 저는 보물보다도 땅 위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보석 전부보다도 크라리드 성 위에서 빛나는 햇빛 한 줄기가 그립습니다..”
물욕 없는 마음에 더욱 반한 로크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이 청혼으로 인해 아베이유는 자신이 조르쥬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진주를 보니.. 조르쥬의 눈동자가 생각납니다. 호숫가에서 헤어진 후 소식도 모르는 그가 그립습니다. 그때.. 전 어린아이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제 감정을 깨닫지 못했어요.”
청혼을 거절당한 로크는 비탄과 질투심으로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왕이다. 학식도, 보물도 충분하다. 인간보다 고귀한 난쟁이 중에서도 난 왕이다. 그런데도 공주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학식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는 인간 따위..’
‘..심미안이 없는 공주 따위 비웃어줘야 해.. 그러나 난 공주가 좋아. 어찌 되었든 간에 좋아. 아아! 공주가 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이 전부 싫어졌어..’
괴로워하던 로크는 조르쥬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짓는 아베이유를 보며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아베이유의 행복이라는 것을. 그를 위해 갖추어야 할 품위는 타인에 대한 포용력이라는 것을.
한편 납치되어 끌려간 조르쥬는 아베이유에 대한 걱정뿐이다. 냉정하고 아름다운 호수의 여왕은 골치 아픈 학문이나 교양 따위는 잊고 놀이와 향락을 즐기라고 권한다. 그러나 조르쥬는 아베이유에 대한 사랑과 걱정을 거듭 밝히며 돌아가고자 한다. 집착에 사로잡힌 여왕은 탈출을 시도하는 그를 감금한다.
무력하게 분개하던 조르쥬 앞에 한 난쟁이가 나타난다. 조르쥬는 편견으로 무례하게 굴지만 침착하게 탈출을 돕는 난쟁이의 인품에 감화된다.
칠 년 만에 성으로 돌아온 조르쥬는 아베이유가 지하세계에 끌려갔음을 알게 된다. 조르쥬는 명분에 잡혀 분노만 하지 않고 이제 행동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자신이 보호해주지 못한 아베이유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지하세계에 도착해 기세 등등하게 공격태세를 취한 조르쥬와 달리 난쟁이들은 전투의지가 없다. 대신 낯익은 난쟁이가 아름다운 여인을 데리고 나타난다. 과거의 은인이 적으로 나타나자 조르쥬는 당혹스러워하고 로크의 간절함을 아는 아베이유는 망설인다.
“로크 왕, 당신은 어째서 나와 싸우지 않습니까? 다음에 만날 때 우리는 적이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크는 조르쥬의 사랑에 희생도 불사할 용기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며 둘의 사랑으로 관대함을 배우게 된 자신에게 만족한다고 말한다. 로크의 따뜻한 배려 속에 아베이유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조르쥬에게 달려간다.
아동용으로 각색되긴 했지만 금성 전집 수록분은 로맨스의 감정선을 비교적 충실히 유지하고 있다. 이세계의 갖은 묘사 중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신비로움을 고조시킨다. 종교적 금욕 아래 지배층이 갖춰야 할 양심과 명예에 대한 가치 수호는 기사도 형식을 통해 우아하게 묘사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로크라는 현자를 통해 ‘어른의 사랑’을 보여준다.
사랑을 거절당한 로크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괜찮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그러나 그는 아베이유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무력으로 쟁취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간절함이 폭력이 될까 오히려 그녀를 피해 다닌다. 비탄과 괴로움 속에서도 로크는 아베이유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기비하에 머무르지 않고 다수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짧게 지나가긴 하지만 집착을 자존감으로 착각하는 호수의 여왕과 달리 로크는 폭력을 경계한다. 순정으로 포장된 자기 연민에 매몰되지 않고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함으로써 그 나름의 사랑을 완성시킨 것이다.
아베이유 역시 로크의 마음을 받을 수 없기에 그의 호의를 이용하지 않는다. 로크가 보여준 따뜻함과 배려에는 분명한 감사를 보낸다. 치기를 부리며 나서고 보던 경솔한 조르쥬는 자신이 져야 하는 책임에 최선을 기울일 줄 알게 된다. 그래서 사랑을 거절당한 로크에게 후회는 없다.
최근 ‘안전 이별’에 대한 기사를 많이 보았다. 연인이 헤어질 때 주로 여자 쪽이 물리적 폭력이나 스토킹에 노출되지 않고 합의함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헤어짐의 무게가 가벼울 리 없지만 언제부터 이별에 안전이란 단어를 붙이게 된 걸까? 과거 귀여움으로 애써 포장하던 찌질남 정서가 ‘나를 거절하다니..’라는 분노가 점철된 자의식 과잉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예의 바른 상식적인 남자란 이미 판타지가 된 걸까? 분노를 통제 못하는 폭력남들과 리벤지 포르노, 실연 폭행 같은 범죄가 너무도 쉽게 사면받는 대한민국이다.
서로 기억하는 사랑의 풍경이 다르듯 되돌려 받지 못한다 해도 그 상실마저 사랑의 일부이며 역사이다.
부디 성숙한 당신이기를. 최고의 미녀를 얻진 못할지라도 그 성숙함으로 당신은 내내 아름답게 추억될 것이다. 그것 또한 분명 완성된 사랑이다.
@출처/ 아베이유, 아나톨 프랑스 (Abeille, Anatole France, 1883)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21권 프랑스 편, 아베이유 공주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이문희, 일러스트 와카나 케이 若菜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