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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Feb 25. 2016

달의 신전, 김진의 건축


아마도 달은 가장 많은 소망과 사연이 담긴 위성일 것이다.

애조 띠거나, 낭만적이거나, 때로는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무수한 심상을 몰고 온다. 자신의 형태처럼 바뀌는 함의는 이야기꾼들의 창의력을 건드린다.


<달의 신전>은 김진 작가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장르적 특징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상이한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김진은 한결같이 인간의 심연과 좌절, 그에 대한 위로를 묘사해 왔다. 

장르적 특성을 극대화시킨 세계관을 구축하거나 (신들의 황혼, 푸른 포에닉스), 플랫폼을 차용해 캐릭터 플레이를 하거나 (인형 전사, 러브메이커), 드라마에서 벗어나 컷 자체의 즐거움에 집중한 (조그맣고 조그마한 사랑이야기, 작은 친구들) 시도들 말이다. 작품 행보가 뮤지컬, 게임, 소프트웨어까지 닿은 것은 이런 실험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달의 신전>은 읽어볼수록 ‘내러티브’에 관한 작가의 관심이 느껴진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란 고민이 미스터리의 구조 쌓기로 구현되고 있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 김진의 절판작을 뽑으면 상위에 올라오는 작품이지만 복간은 요원해 보인다. 발표되던 당시 구조적 실험과 그로 인한 신선함이 세월이 흐르며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의견 분분했던 결말 또한 다시 읽어보아도 충격적이지만 새롭진 않게 되었다. 수많은 장르물로 인해 발간 당시의 파격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만큼 시대를 앞섰던 실험작이 아닐까 한다.


<월간 로망스> 창간작으로 야심 차게 시작된 연재는 해당 잡지가 폐간되며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단행본으로 완간되었다. 작가의 화풍이 거친 펜터치로 변하던 시기에 재발행되어 그림체에 좀 차이가 있고, 전개도 연재 당시와 다른 순서로 재편집되었다. 촘촘하게 배치된 전반부의 설정에 비해 결말은 성급하게 마무리된다. 김진의 특기인 내밀한 정서 표현도 비교적 간략하게 처리된다.

부분적으로 명분에 휘둘리는 희생의 무의미함, 절명의 순간 생존 본능에 관해 말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고대 문화사의 모럴을 따지는 자체가 비약일 수 있기에 이런 정서는 부차적인 도구로 사용된다.

오히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시키는 것은 불가항력적 운명 아래 펼쳐지는 윤회와 업이다. 다소 안이하게 편리한, 그러나 작품 분위기와 썩 어울리는 이 장치는 겹겹이 쌓아 올려져 이야기 자체의 파급력을 보여준다.

또 작품의 주인공들은 1세계 백인이지만 배경은 3세계 취급을 받는 멕시코시티-아즈텍이다. 이런 설정은 문화적으로 상이한 정서 접목의 거부감을 줄이고 공간적 신비함을 가미한다.


줄거리는 매우 심플하다. 사랑에 빠져 본의 아니게 신과 인간을 동시에 배반한 여사제와 그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쇼치필리, 몇 세기를 뛰어넘는 테스카트리포카의 복수, 이들이 펼치는 우연의 운명과 업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 내 수록된 아즈텍 신화에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의 시구는 내용 이해를 위해 작품 내 삽입된 장면을 순차적으로 편집했습니다.)



쇼치필리, 청춘과 꽃의 왕자 = 데이크, 두 번째 제사의 제물.

이슈타크 슈아토르, 하얀 잠의 여신 = 아델라, 인신공양을 집행하는 네 명의 여사제 중 한 명.

여사제와 사랑에 빠진 아즈텍 왕자 = 에이브, 테스카트리포카쪽 제물, 첫 번째 제사의 제물이었지만 거래를 통해 신탁을 조작, 목숨을 구함.

테스카트리포카, 촌라족의 족장, 쇼치필리의 형 = 죽은 쌍둥이 형, 테스카트리포카의 생령.

케아로코아틀 = 비의 신 들락클로를 대신해 인간의 영혼을 나비로 구제해준 신.

시와테테오 = 복수의 여신을 상징하는 혜성, 전쟁의 주기를 암시하던 이 혜성의 주기에 맞춰 살인(복수)이 이루어짐.


그때의 네 이름은 잠자는 하얀 여신이었다.

신의 네 딸 중 하나, 여사제이고 사랑이 금지된 여자

너와 사랑하였으므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 전생에 여사제였던 아델라와 열두 부족 왕자 중 한 명인 에이브가 사랑에 빠진다.


꽃의 왕자 쇼치필리는

어둠의 태양 테스카트리포카의 단  하나밖에 없는 형제.

그때  열여섯 살이었고

꽃의 전쟁에 참가할 전사가 되기 시작했다.

— 촌라족 왕자 쇼치필리가 인신공양제인 ‘꽃의 전쟁’에 참가했다 포로가 된다.


‘케아로코아틀’은 날개 달린 뱀

그가 말했다.

‘나비를 주마’

— 케아로코아틀의 전설을 이용, 여사제는 신탁을 조작해 연인과 쇼치필리를  맞교환하기로 밀약한다.


하지만 그들은 심장을 바쳤다.

젊은 꽃이 피를 뿌렸다.

— 그러나 여사제의 신탁은 무시되고 쇼치필리가 제물로 바쳐진다. 사제단은 피가 아닌 나비를 바쳐왔기에 태양신의 힘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광기에 물든 집단의 근거 없는 폭력이 무고한 희생을 불렀다.


달의 신전 제 1계단에서부터 제 13계단까지

— 시와테테오와 더불어 현세에서 복수가 반복되는 주기를 암시한다.


사랑과 청춘의 왕자 꽃 같은 ‘쇼치필리’가 흘러내렸다.

— 테스카트리포카와 여사제의 노력에도 쇼치필리는 관습적인 제물로 희생된다.


어둠의 신 테스카트리포카가 그의 심장을 받았고

시와테테오가 영혼을 감싸 안았다.

저주를 받으리라.

저주를 받으리라.

— 테스카트리포카가 복수를 다짐한다.



속도감 있는 미드의 분위기를 구사하는 이 작품은 완간작임에도 아쉬운 점이 많다.

우선 인물별 의식에 기댄 전개는 단순한 이야기를 꼬았을 뿐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과거사를 대입해 결말을 추론해보는 것이 장르물로서 이 작품을 즐기는 법일 것이다. 결말의 ‘~되었습니다’..라는 안이한 설명도 불특정 독자층을 생각해보면 최선의 친절로 보인다. 하지만 배경 외에 고대 부분의 고증이 애매한 것은 여전히 아쉽다. (코스튬으로 먹고 들어가는 아즈텍이 아닌가 말이다~!!)

거기다 서화판 단행본은 종종 내용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식자 처리가 엉망이다.


화풍 또한 장르물로서의 파급력을 강조한다. 달의 피라밋을 선회하는 부감 장면은 블록버스터와 같은 쾌감으로 본격적인 전개를 펼친다. 단행본 판형은 어쩔 수 없었지만 <로망스> 연재분은 큰 판형을 이용해 압도적인 장면 전환을 보여줬다. 이전 작품에 비해 확연히 거친 펜터치조차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간 수직과 수평으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그 위로 교차 편집된 과거사는 미스터리의 은밀한 느낌을 한층 고조시킨다.

초반에 보여준 웅장한 느낌이 후반까지 유지되었다면 엔딩의 파급이 훨씬 컸을 듯 해 내내 아쉽긴 하다.


1990년대 여성 독자 대상의 순정 만화계는 그 다양성에 불구하고도 순정의 외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달의 신전>은 로맨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로맨스를 부차적인 도구로 활용한 김진의 야심 찬 실험이다.





@출처/ 달의 신전, 김진

달의 신전 (서화,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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