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에서 책 읽기 Feb 29. 2016

굵은 다리의 베르트 공주, 작은 흠


수 십 년 전 발행된 전집을 읽다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른 가치관 차이와 문법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시간의 두께 속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간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떤 서사들은 디테일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제목부터 흥미진진한 <굵은 다리의 베르트 공주>도 그런 이야기다.

수많은 공주들 가운데 다소 특이한 수사의 이 공주 이야기는 ‘베르트라다 Bertrada of Laon’ 가계를 모티브로 하는 구전 전설이다. 중세 유럽, 절대왕국을 이룬 샤를마뉴 대제의 어머니 베르트라다는 ‘큰 발의 베르트 Bertha of the Big Foot’로 불렸다. 반면 작고 왜소한 체구였던 그녀의 남편은 ‘난쟁이 피핀 Pippin the Short’으로 칭해졌다. 이 커플의 대조가 재미있게 여겨져 모티브로 차용된 듯하다.

실제 베르트라다와의 연관성을 떠나 이 전설 역시 갖가지 오류로 뒤덮여 있다. 공간적 배경인 프랑스는 정황상 프랑크 왕국의 오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시간적 배경이 중세이다 보니 인권보다는 혈통에, 개연성보다는 운명에 맞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일러스트를 맡은 고가 아소우는 금성 전집 내에서도 월등한 이미지를 구사한다. 아름답고 유려한 그의 그림은 중세 왕국의 창창함에 대한 상상을 북돋아준다.

고가 아소우는 인물 중심으로 묘사되는 보편성에서 벗어난 이미지 서사를 보여준다. 구도에 따른 시점 배분으로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유도하거나 관조하듯 펼쳐놓은 풍광으로 사건을 강조한다. 인물만큼 섬세하게 묘사된 코스튬과 배경은 다소 막장스러운 왕실 스캔들을 더없이 아름답게 포장한다.




강력한 왕권을 다진 샤를르 상왕은 외아들 ‘페팡’이 못마땅하다. 결혼해 후사를 이을 생각은 안 하고 매일 밤 질펀한 유흥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까칠한 젊은 왕의 눈치만 보던 어느 날 밤의 연회, 한 음유시인이 마음만큼 외모도 아름다운 헝가리 공주 ‘베르트’에 대해 노래한다. 한쪽 다리가 살짝 더 굵어 ‘굵은 다리의 베르트 공주’라고 불리는 그녀에게 페팡은 관심을 보인다.

한쪽 다리가 살짝 굵은 베르트 공주에게 관심을 보이는 페팡 왕. 내려다보는 시점을 통해 신분을 강조한다.


베르트 공주의 어머니 ‘브란슈프라알 왕비’는 딸의 혼담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강국의 왕비가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단신의 페팡 왕이 외모도 보잘것없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베르트는 페팡이 훌륭한 인품과 용감한 성정을 갖췄다고 들었으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자체의 모습으로 존경하겠다고 한다.

인물뿐 아니라 섬세한 코스튬 묘사가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주인공인 공주에게 시점이 맞춰지는 일반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시점을 행렬 자체에 두어 사건을 강조한다.


혼사가 성립되어 베르트는 페팡 왕이 있는 프랑스로 떠난다. 타국에서의 첫날밤, 베르트의 유모 ‘마르지스트’는 페팡이 술에 취하면 난폭해진다며 걱정이다. 왕이 잠들 때까지만 베르트와 비슷해 보이는 자신의 딸 ‘아리스트’를 들여보내자고 제안에 감동한 베르트는 그녀의 말을 따른다.

그러나 마르지스트의 이 계획은 베르트의 신분을 가로채려는 음모였다. 아리스트를 신부로 오해한 페팡은 음모에 걸려들고 베르트는 페팡과 마주할 틈도 없이 주군을 살해하려 한 시녀라는 누명을 쓰고 쫓겨난다. 마르지스트의 아들 ‘티베르’에게 살해될 위기에 처한 베르트는 동행한 기사들의 도움으로 도망친다. 숲 속을 헤매던 베르트는 친절한 노부부의 도움으로 구 년간 은신한다.


한편 아리스트를 베르트로 알고 있는 페팡은 두 아들까지 두게 된다. 마침 후사가 없던 헝가리의 요청에 한 아들을 보내려 하자 베르트 행세 중인 아리스트는 거세게 반대한다. 딸의 성정이 냉정하게 변한 것을 의아하게 여긴 베르트의 어머니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한다. 프랑스에 가까워질수록 왕비는 딸에 대한 흉흉한 민심에 거듭 놀란다.

마르지스트는 브란슈프라알 왕비와 페팡 왕 마저 독살해 안전을 도모하려 한다. 아리스트는 병을 핑계 삼아 어두운 방에 기거하지만 그녀의 다리를 만져 본 왕비는 딸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음모가 발각된 마르지스트 일당은 처형당한다. 뒤늦게 페팡은 유품이라도 찾겠다며 베르트가 사라진 숲을 대대적으로 수색한다.

어느 날 신비한 흰 사슴을 쫒던 페팡은 숲에서 길을 잃는다. 우연히 마주친 베르트를 찾아내지만 그녀는 두려움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페팡의 조치로 어머니와 재회한 베르트는 무사히 신분을 되찾는다.




앞서 말했듯이 과거의 동화들은 시대성으로 인해 종종 불편한 의문을 품게 한다. 왜 페팡은 애초에 더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을까? 명색이 국혼인데 베르트는 인척 없이 시녀만 동행한 걸까? 반려자인 외국인 왕비가 민심을 잃을 정도로 폭정을 일삼는 동안 절대 왕권을 지닌 왕은 무얼 했나.. 등등 이 전설 역시 갖가지 오류로 교훈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공감 가는 것은 베르트에 대한 페팡의 관심이다. 사실 조금 더 굵은 한쪽 다리 따위가 뭐 그리 신기한 일이겠는가. 그렇지만 페팡은 흠으로 여겨지던 작은 차이에 마음이 갔던 것 아닐까?

절대왕국을 이룬 아버지, 왕권과 후사에 대한 주변의 훈수로 인해 페팡은 알게 모르게 중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신의 축복은 멋진 외모까지 주진 않았다. 외모 하나가 뭐 그리 큰일이겠나 싶지만 콤플렉스란 본인에겐 가장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짐짓 냉소를 가장해 온 젊은 왕은 타고난 작은 차이가 있는 이라면 자신의 나약한 부분에 공감해주리라 기대했던 것 아닐까?

종종 증명된 이성보다 자신도 모를 감정에 휘둘릴 때가 있다. 그런 선택들은 스스로에게만은 솔직하고자 하는 작은 반발일지도 모르겠다.





@출처/ 굵은 다리의 베르트 공주 (Berthe au Grand Pied)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16권 프랑스 편, 굵은 다리의 베르트 공주 (금성출판사, 1979, 번역 박홍근, 일러스트 고가 아소우 古賀 亜十夫)



작가의 이전글 달의 신전, 김진의 건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