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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07. 2016

여왕님의 키스를 훔친 도둑,
여왕 폐하의 봄


확연히 대기가 달라진 봄날의 밤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설레임과 기대감을 실어 나른다. 오랫동안 잠겨있던 기억을 소환해내기도 한다. 신일숙 작가의 소품 <여왕님의 키스를 훔친 도둑>은 봄밤의 분위기로 가득한 곡 ‘여왕 폐하의 순정’을 닮아있다. 제목만큼 서사도 비슷한 두 작품은 고고한 여왕님의 소회를 나직이 들려준다.


할리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아테네> 같은 로코물로 인지도를 얻었지만 신일숙 작가의 장기는 판타지 기반 대하 서사이다. 신화적 세계관 속에 여성의 자립과 연대를 지속적으로 그려왔다. 페미니즘 사관의 데뷔작 <라이언의 왕녀>에서 시작된 신일숙 작가의 장르 선호는 불세출의 인기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이후 공고해진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 <리니지>는 물론 당시로선 드문 시도였던 순정 SF물 <1999년생> 등 대표작들은 그녀가 구축한 가상의 세계관을 동력으로 움직인다.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가진다’.. 는 잊혀지지 않는 카피를 통해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연대기를 그린 <아르미안의 네 딸들>. 아마도 이 작품의 손꼽히는 하이라이트인 스와르다의 죽음 후 성경 속 와스디나 크세르크세스를 찾아본 이도 꽤 있을 것이다.


역사를 차용해 요정과 신화를 버무린 판타지는 빼어난 그림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신일숙 작가의 아름다운 화풍도 단점은 있다. 우선 현대물의 코스튬이 촌스럽고 흑백임에도 광택이 도는 펜터치 데생은 종종 맥 없는 컬러링에 잠식된다. 아름다운 인물들도 어느 순간 점점 길어진 얼굴로 캐릭터와 상관없이 음울하게 보이기도 했다.

김진, 김혜린, 오경아 작가가 <댕기>의 주포로 장기 연재를 시작하던 때 신일숙 작가는 짧은 컬러 에스프리를 고정 연재한다. 8페이지 분량이긴 해도 무려 격주로 컬러 원고를 그려내던 이 시기 신일숙 작가의 컬러링은 점점 완성도를 높여간다. 비록 탁월한 컬러 감각을 지닌 작가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본인만의 컬러를 찾아 정착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이 시기에 발표된 <여왕님의 키스를 훔친 도둑> 은 그녀의 특기인 중세를 배경으로 로맨스의 기운 물씬한 컬러가 섬세하게 입혀져 있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훔쳐내고 마는 희대의 도둑 히아킨토스.

향기 강한 히아신스 한 송이를 두고 사라지는 그의 행각은 대중들에게 더욱 신비롭게 받아들여진다.

여왕님의 탄신 무도회, 은은한 히아신스 향기가 풍기자 사람들은 술렁거린다. 이 성대한 무리 중 히아킨토스가 잠입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춤을 추던 사람들은 서로를 살피며 하나, 둘 대열에서 이탈하고 한 커플만이 남는다. 젊은 여왕이 정체 모를 미남과 춤을 추고 있었다.


유유한 춤이 끝나자 여왕이 파트너에게 묻는다.

 

“그대는 누구인가?”

“오.. 친애하는 여왕님, 소문의 도둑 히아킨토스가 저입니다.

.. 오늘 저는 이 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훔쳐 사라질 것입니다.”


순식간에 여왕의 입술에 키스하고 궁전을 탈출하는 히아킨토스. 그를 잡는 이에게 왕국의 절반과 부군 자리를 포상하겠다는 지명수배가 내려진다. 하지만 그는 잡히지 않았고 다시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 후로 여왕은 두 가지 마음을 품은 채 오래도록 독신으로 살아간다.

그가 영원히 잡히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하나와,

그가 잡혀서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볼 수 있길 바라는 두 가지 마음을.




미남에게 성추행의 당위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기에 현재 읽기엔 매력이 떨어지는 서사이다. 신일숙 작가가 지속적으로 의식해 온 여성주의 시선으로 읽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다. 개인적인 로망에 대한 기대와 품위 사이의 내밀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짧은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페퍼톤스가 작곡한 ‘여왕 폐하의 순정’이 떠오르게 한다. 멜로디만큼 가사도 무척 아름다운 이 곡은 엄정화의 목소리 또한 퍽 조화롭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고고한 여제를 연상시키는 이에 그녀보다 적합한 사람이 있을까?


고운 빛깔의 달과 투명한 햇살을 부리는 고귀한 여왕님도 봄의 실바람 앞에 짧았던 청춘을 떠올린다. 지금도 아름다울 그녀겠지만 갖은 축복이 쏟아지던 성인으로서의 첫날처럼 싱그럽진 못할 것이다. 여왕의 관을 받아 들며 묻어야 했던 여성으로서의 자신, 끝내 너무 먼 인연이 된 그와의 추억.. 모두 물러간 자리 왕관을 벗고 잠시 혼자이고 싶은 여왕님.*

고단함에도 홀로 서있길 선택한 그녀의 문 밖을 잠시 지켜주고 싶어 지는 것이다.

언제나 봄은 짧고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출처 및 인용/ 여왕님의 키스를 훔친 도둑, 신일숙

댕기, 여왕님의 키스를 훔친 도둑 (육영재단, 1991년 11월)


*엄정화 9집 Prestige, Track 11 여왕 폐하의 순정 (작사 배영준, 작곡 페퍼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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