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라는 단어는 사실 중독자의 줄임말 아닐까? 무해함을 어필해 볼 뿐 ‘애독자’란 명칭 또한 취향 이상의 몰입이 담겨있다. 놀랍도록 신기하거나 멋진 이야기도 그저 그런 뻔한 이야기도 제각각의 요령으로 우리를 책장 앞에 인계한다. 실체가 있는 사람이건 문자 속에 잠긴 안내자건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꾼에 혹하고 만다.
<비밀의 화원> 주인공 메리처럼 키플링도 식민지 시절의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 고위 귀족이었다. 대표작 <정글북>을 비롯해 그의 독창성은 다종의 문화 위에 세워진 체험에서 기인한다. 세련된 의인화법,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인 이종의 문화, 자연과 문명의 충돌에 관한 통찰로 키플링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키플링의 단편 <단지 속에 들어간 공주님>은 메리가 즐겨 들려줬을 것 같은 이국적 풍취의 동화이다. <벌거숭이 임금님>과 비슷한 작은 교훈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이야기가 몰고 오는 ‘이미지’에 있다.
나른한 오후 정원에서 춤추는 홍학 떼 (홍학이 노는 정원이라니!!), 거대한 단지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공주님, 황금 불꽃을 튀기며 단지 주위를 폭풍처럼 돌아대는 마법의 호랑이와 번개, 군인들.. 식탁에 턱을 괸 채 듣는 이국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상상이 절로 꼬리를 물고 피어나게 한다. 이미지보다 아름다운 키플링의 문장은 인도인 유모의 입을 빌린 액자식 구성으로 신비한 여운을 더한다.
햇빛 노곤한 정원에서 진흙을 개어 던지며 홍학의 춤을 구경하는 판치와 쥬디는 인도에 살고 있는 영국인 어린이들이다. 귀찮아져 달아나는 홍학을 쫓아가던 둘은 넘어져 무릎이 까진다.
다정한 인도인 유모는 울먹이는 둘을 능숙하게 달래며 ‘델리의 공주님’ 이야기를 해준다.
아름다운 공주에게 최고의 신랑을 구해주기 위해 델리의 임금님은 묘수를 낸다.
커다란 단지에 들어간 공주님을 힘과 슬기로 꺼낸 자를 남편으로 삼겠다고 공표한다. 온 나라의 젊은이들은 단지 속 공주님을 꺼낼 방법을 찾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흩어진다. 마법사나 난쟁이를 찾아간 자도 있었다. 모두들 단지를 열기 위해선 거대한 마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 년이 지나 도전자들은 단지를 둘러싼다. 휘황한 마법을 통해 무시무시한 호랑이와 거대한 뱀, 마법의 군대와 지진이 단지를 흔들어 댔다. 그러나 공주님은 나오지 않는다. 지친 도전자들이 한숨을 쉬는 가운데 허름한 젊은이가 나섰다. 마법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젊은이가 말했다.
“단지는 언제나 단지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단지를 만드는 집의 아들이야!”
젊은이는 맨손으로 힘껏 단지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뚜껑이 열린 단지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꽃송이 같은 공주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야단스러움과 경솔함을 부끄러워한다. 단지 가게의 아들은 공주님과 행복해졌다.
19세기의 유럽 그중에서도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며 ‘세계의 은행’으로 불렸다. 산업화로 인한 교통의 발달과 제국의 부강함은 어느 때보다 활발한 모험과 원정을 불렀다. 이 시기 영국은 고대 로마보다도 더 많은 땅을 소유했다. 당시 지도층의 관심사는 탈취한 식민지들을 규합하고 지배를 위한 엘리트 계급을 공고히 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원주민 문화를 파괴하면서도 문명을 선도하는 것이 제국의 의무라는 자화자찬에 빠져있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장르물의 주요 콘텍스트로 반영된다. 아동 문학에도 퍼블릭 스쿨을 중심으로 한 학원물과 아동 대상 모험물이 대거 등장한다. 명칭과는 반대로 상류층 전유 교육 기관이었던 퍼블릭 스쿨은 예비 엘리트를 키워내기 위한 계급 기관이었다. 키플링의 대표작 <정글북>에는 상이해 보이는 이 두 장르가 녹아있다.
<정글북> 원전에서 모글리의 이야기는 전체 에피소드의 일부일뿐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인간의 아이가 늑대 무리 안에서 자란다는 설정은 여전히 가장 매력적이다. 신체적으로 열세하던 모글리는 도구와 불을 다룸으로써 정글의 지도자로 거듭난다. 시오니 늑대 무리를 벗어나 인간사회로 복귀하는 모글리의 인생에는 이종의 문화가 만났을 때의 충돌이 겹쳐진다.
작품 속 모든 존재는 자연에 순응할 수밖에 없기에 생존의 원칙에 집중한다. 때문에 <정글북> 속 지도자는 개인과 윤리에 의거한 사회적 자질보다 생존을 선도할 본능적 자질이 중시된다. 키플링은 정복되지 않는 거대한 정글마저 타고난 특질로서 선도해나가는 선택받은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이런 구조는 앞서 말한 기존 학원물과 모험물의 서사를 합쳐 비튼 셈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말년의 키플링은 혹독한 제국주의자로 악명 높았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 루이스의 소회처럼 키플링의 집필 후반기는 제국주의로 점철된다. 심지어 대표작 <정글북>은 작가 자신에 의해 수난당했다. 키플링의 다른 작품 <In The Rukh>에서 인도의 공무원이 된 모글리는 퇴직 연금을 고대하며 가장 애틋한 가족이던 늑대 ‘잿빛 형제’를 백인을 위한 사냥감으로 내몬다. (펭귄클래식, P.18)
‘해가 지지 않는 시절’의 영국은 계급제 나라답게 출생지에 따른 차별도 있었다. 식민지 파견은 이른바 한 급 떨어지는 지방 파견이었고 파견직 관리의 부인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출산했다. 수상까지 배출한 고위층의 자녀임에도 인도에서 태어난 키플링은 런던의 사교계 안에서 배타적 편견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학연, 지연으로 범벅이 된 계급제는 그를 남성 우월론자이자 제국주의자로 바꿔놓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문장과 함축적 서사에 당대의 독자들 또한 양가감정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저 뚜껑을 열면 되는 단지처럼 근원적인 삶에는 어떤 수식도 필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느니 들고 있던 단지에 비나 호랑이를 불러들인다.
극 중에서 이런 작은 교훈을 들려주는 이는 인도인 유모다. 유색인종 하녀의 지혜와 애정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편견 없이 웃음을 나누는 판치와 쥬디는 키플링이 망각한 그 자신의 유년이 아니었을까?
@출처/ 정글북,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The Jungle Book, Joseph Rudyard Kipling, 1894)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25권 영국 편, 키플링 단편, 단지 속에 들어간 공주님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정성환, 일러스트 야마모토 다타요시 山本忠敬)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3권 영국 편, 정글북 (금성출판사, 1979, 번역 박재삼, 일러스트 고가 아소우 古賀 亜十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