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지성과 개성에도 여성 창작자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연인으로 먼저 각인된다. 미처 가릴 수 없는 재능에는 기어이 ‘뮤즈’라는 의뭉스러운 칭송을 붙여 치졸하게 끌어내린다.
조르쥬 상드 또한 지금까지도 ‘쇼팽의 연인’이라는 수식이 먼저 붙는 여성 창작자다. 그녀의 사랑이 쇼팽 한 명이 아니었듯 그녀의 지성도 예속을 거부하며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농민과 자연에 관심 가졌던 상드는 소박한 전원 소설들을 발표했는데 <사랑의 요정>이란 제목으로 유명한 <소녀 파데트 La Petite Fadette, 1849>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소설이 출간되던 해 그녀의 이름 앞에 붙던 연인 쇼팽은 사망한다.
#조르주 상드, 사랑의 요정 https://brunch.co.kr/@flatb201/181
쇼팽 이후에도 화려한 연애를 이어갔던 상드도 결국은 할머니가 되었다. 노년의 상드는 손녀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처럼 낭만적인 문체로 성숙함이 더해진 동화를 썼다. 동화집 <할머니의 이야기 Contes d’une Grand-Mère>는 <픽토르뒤 성 Le Château de Pictordu>, <장밋빛 구름 Le Nuage Rose> 등 13편의 동화가 수록되어 있다. 국내에도 수록분 일부가 원전 그대로 번역되어 있는데 자연이 주는 소회를 소박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이 중 한편인 <말하는 떡갈나무 Le Chêne Parlant>는 불우한 환경의 소년 에미가 자연에 의지해 주체적인 삶을 일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금성 전집 안에서 이 작품은 우에다 다케지의 감각적인 일러스트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컬러, 흑백 모두 편차 없는 화풍과 팬시한 캐릭터가 에미의 기이한 체험을 생생하고 아기자기하게 묘사한다. 시점 역시 부감을 통한 조망으로 장면마다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런 구도는 떡갈나무 곁 에미의 체험에 우리를 동참시킨다.
마치 그 자신이 불행의 상징인 듯 못생기고 무지한 고아 에미.
가난으로 학교도 못 가고 머슴살이 중인 그는 돌봐야 하는 돼지들이 무섭고 벅차다. 어느 날 돼지들의 심술을 피해 에미는 숲으로 도망친다. 그가 은신한 곳은 세르나 숲의 터줏대감 ‘말하는 떡갈나무’ 위였다. 500세가 넘는 이 나무는 다가가면 큰 소리로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알려져 누구도 얼씬하지 않는다. 비참한 생활에 지친 에미는 농가로 돌아가지 않고 나무에서 지내게 된다.
야생의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에미는 스스로를 위한 노동에 능숙해진다. 비록 나무에 은신하는 처지지만 떡갈나무와 자연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고 함께 할 방법을 모색한다. 자급자족에 익숙해질 때쯤 에미는 우연히 거지 할머니 카티슈를 알게 된다. 홀로 지내는 숲 속 생활로 사회성을 잃게 될까 고민하던 에미는 함께 지내자는 카티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만류하는 듯한 떡갈나무를 뒤로 한채 에미는 카티슈를 따라나선다.
카티슈를 따라온 에미는 깜짝 놀란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카티슈의 행동은 구걸을 위한 연기였다. 사기와 도둑질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그녀는 재물을 쌓아만 둔 채 더러운 집에서 남루하게 산다. 카티슈의 멈추지 않는 탐욕으로 곡마단에 팔리기 직전의 에미는 선량한 농부 붕상의 도움 덕에 위기에서 벗어난다.
에미는 붕상의 밑에서 글과 기술을 배우게 된다. 떡갈나무 곁에서 익힌 성실함과 총명함으로 에미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일꾼이 된다. 은신했던 떡갈나무를 둘러보러 간 에미는 나무에서 보냈던 아름다운 계절들을 회상한다.
사회에서 외면당한 에미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은 야생 그 자체의 자연이다. 마법의 떡갈나무로 대표되는 자연은 조건을 걸지 않는 풍족함으로 에미의 홀로서기를 도와준다. 오히려 제도가 구비된 인간 사회에서 에미는 야만적인 상황에 던져지고 비참하게 살아간다.
세르나 숲의 떡갈나무가 진짜 말할 수 있는지 그저 구전되는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에미의 혼잣말을 들어주고 홀로서기의 터전이 되어준 떡갈나무는 그의 첫 번째 멘토이다. 떡갈나무 곁의 생활로 에미는 한 사람 몫의 자립을 시작한다. 카티슈의 탐욕을 반면교사로 에미는 두 번째 멘토이며 사회적 멘토인 붕상을 통해 미래가 약속된 계층에 재편입된다. 나무에서 내려와 스스로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21세기의 에미들도 은신하던 나무에서 내려와 스스로 뿌리내릴 수 있을까?
뿌리내릴 터전 자체가 말라버린 대한민국에서 단단히 서있겠노라 다짐하는 의지는 참 서글프다. 에미의 불행 중에 ‘교육받지 못한 무지함’이 포함된 것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성실한 노동과 교육은 비천한 계층의 에미가 이전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도록 해준다.
아마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에미와 같은 환경에 던져진다면 계층이동이 더 힘들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현대의 계급 속에서 좀 더 나은, 다른 내일을 위한 사다리가 되어주던 교육마저 효용을 잃고 있다. 성공한 연예인이 되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더 확실한 보증이다.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기댈 수 있는 튼튼한 나무를 많이 심어두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어른들이 할 일이다.
@출처/
말하는 떡갈나무, 조르쥬 상드 (Contes d’une Grand-Mère, Le Chêne Parlant, George Sand, 1855)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22권 프랑스 편, 말하는 떡갈나무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오영민, 일러스트 우에다 다케지 上田武二)
상드 동화집, 말하는 떡갈나무 (지만지, 2013, 번역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