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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10. 2016

초원의 집, 목요일의 버터


일상의 놀이는 어린이들에게 세상의 비밀을 깨우쳐 준다. 협업 같은 사회적 관념부터 취향 같은 개인적 실현에 이르기까지 예비 경험은 우리의 나이테에 일조한다. 어린이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무엇’에 대한 로망이 있다. 소꿉놀이건 역할놀이건 스스로가 참여해 의미를 가지는 기념품을 간직하게 된다.



일상의 문화사

로라 잉걸스의 자전적 동화 <초원의 집 시리즈>는 서부 개척시대 미국 이민자들의 자급자족과 일상을 꼼꼼하게 복기한다. 개인적 연대기가 흔히 그렇듯 이 시리즈도 윤색된 추억 보정이 존재한다. 로라의 관찰을 실제 역사에 대입해 보면 편향적이거나 부정적 부분은 거세된 채 낙관만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려견 잭의 에피소드나 작품 전체에 걸친 인디언 이주가 대표적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고난 역시 사회적 증언이라기 보단 개인사에 그친다.

등장인물들 또한 노선에 따라 편향적으로 묘사된다. 로라가 이상적으로 그린 아빠를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역동적이고 불확실한 시대, 정착할만하면 역마살이 도지는 배우자를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로라의 엄마가 남편을 무척 사랑했구나 싶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문명의 추억일 도자기 인형을 조심스레 선반에 얹으며 남몰래 한숨께나 쉬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시대만큼 역동적이고 치열한 문화사적 증언으로 채워진 시리즈다. 과거에도 지금도 유효할 진짜 일상을 엿보는 즐거움이 존재한다.

 

자국에서의 인기만큼 이 시리즈는 국내에서도 여러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가장 친숙한 판본은 에이브 전집의 <큰 숲 작은 집 Little House in the Big Woods>, <우리 읍내 Little Town on the Prairie>, 계몽사 문고의 <긴 겨울 The Long Winter> 이 떠오른다. 충실한 번역으로 전체 시리즈를 일괄 복간한 비룡소 전집은 원전에 실린 가스 윌리엄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가스 윌리엄스는 장기간의 취재를 통해 19세기 후반 생활사를 소박하고 따뜻한 화풍으로 그려냈다.


(비룡소 전집 표기를 따릅니다.)

1권 큰 숲 작은 집 Little House in the Big Woods : 위스콘신 주 숲 속 통나무집 거주기

2권 대초원의 작은 집 Little House on the Prairie : 캔자스 주 초원 인디언 거류지 거주기

3권 플럼 시냇가 On the Banks of Plum Creek : 미네소타 주 땅굴 집 거주기

4권 실버 호숫가 By the Shores of Silver Lake : 다코타 주 호숫가 거주기

5권 소년 농부 Farmer Boy : 로라의 남편 앨먼 조의 유년시절

6권 기나긴 겨울 The Long Winter : 드스메트 마을 정착기

7권 대초원의 작은 마을 Little Town on the Prairie : 드스메트 마을 정착기

8권 눈부시게 행복한 시절 These Happy Golden Years : 드스메트 마을 정착기

9권 처음 4년간 The First Four Years : 로라의 신혼일기


청도교 세계관 속 삶에 관해 쓰고 있지만 <초원의 집>은 계도적이라기보다 서술형 일기에 가깝다. 이 시리즈 인기의 진짜 요인은 의식주에 대한 섬세한 묘사이다. 그중에서도 매일의 먹거리에 대한 묘사는 매번 책을 덮고 간식을 찾게끔 만든다. 히코리 훈제, 돼지꼬리 구이와 오줌보 풍선, 단풍나무 시럽, 크리스마스 포트럭.. 종류도 다양한 식탐 도는 복기는 푸르스트의 마들렌처럼 즉각적으로 각자의 추억을 소환한다.

히코리 훈제와 눈 사탕 만들기
수제 인형과 돼지 오줌보 풍선



목요일의 버터

체계적으로 부지런한 로라의 엄마는 주요 일정을 요일별로 분산해둔다. 내가 가장 좋아한 요일은 버터를 만드는 목요일이었다!

로라와 메리는 수제 절구에 담긴 우유가 크림으로 덩어리  때까지 끊임없이 휘젓는다. 로라의 남편이  앨먼 조도 자급자족의 삶에 익숙했기에 틈나는 대로  지루한 작업을 직접 반복했다. 다만 부유한 정착민 집안의 아들인 그는 맥주통 모양으로 만들어진 버터 교반기 Butter Churn 사용해   쉽게 크림 덩어리와 버터밀크를 분리할  있었다. 휘젓기보다 수월하다곤 해도 손잡이를 돌려  뒤로 끊임없이 통을 흔들다 보면 금세 노곤해졌을 것이다.

버터 교반기 butter churn


..이제부터가 버터를 만드는 일에서 가장 재미난 대목이었다. 엄마는 버터를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들었다. 버터 틀의 바닥에는 이파리 두 장이 딸린 딸기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엄마는 버터가 틀 속에 가득 찰 때까지 주걱으로 단단히 다져 넣었다. 그런 다음 납작한 접시에 틀을 거꾸로 뒤집어 놓고 바닥에 달린 손잡이를 밑으로 쑥 밀었다. 그러면 딸기와 딸기 잎 무늬가 새겨진 황금빛 버터 덩어리가 쏙 빠져나왔다.


여름의 버터처럼 예쁜 색을 내기 위해 로라의 엄마는 당근을 이용해 노란색을 입힌다. 여기에 필요한 도구는 손재주 좋은 아빠가 요령껏 만들어 준 투박한 수제품이다. 로라의 엄마는 한정된 자원 속에서도 작은 아름다움을 입히는 수고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연으로부터 취하는 것이지만 약간의 낭비도 경계하며 한정된 재료와 도구에도 공들여 일상을 만들어간다.

물들여 딸기 무늬를 찍어내는 버터, 물려 입기에 소중히 걸치는 드레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수제품 선반, 그 위에 조심스레 올려둔 도자기 인형이 주는 작은 사치.

생존을 위한 노동에 하루를 온전히 쏟아부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도 소모품에 부러 아름다움을 입히는 마음이 그들이 있는 곳을 스윗 홈으로 만든다. 로라의 가족이 통나무집에 살고 있건 땅굴 속에서 생활하고 있건 말이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은 모든 노동이 가족 전체의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작은 물건 하나도 함부로 소비할 수 없는 자급자족 시절 아쉬운 일손 때문만은 아니다. 꼼꼼한 역할분담 하에 어린 로라와 메리도 각자 감당할 수 있을법한 일들을 받아 든다. 이렇게 쌓인 작은 경험은 그녀들이 자신의 터전을 가꿔나가는 법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험한 일을 하는 아빠의 노동만큼 섬세한데 아름답기까지 한 엄마의 노동이 동일하게 존중된다. 매일 하는 식사이건만 그 한 끼에는 온 가족의 노동이 배어있어 모든 끼니는 서로에게 감사하다.

어린 로라와 메리도 가족의 구성원으로 감당 가능한 노동에 동참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선 독신여성도 워킹맘도 고달프기만 하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집안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여전히 구시대의 무게감으로 여자들에게 지워진다. 이런 와중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일련의 논쟁들-손맛이 들어간 아침밥과 집밥, 반드시 엄마가 있어야 하는 육아, 그러나 험한 노동시장을 고려해 당연히 부담해야 하는 맞벌이, 그럼에도 남성의 삶이 더 무겁다는 일관된 편 가르기는 항상 한 세트로 굴러다닌다.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문제조차 여자, 엄마라는 메타포를 씌워 죄책감을 강요하는 현실이다. 가족에 대한 이해는 요원해지고 경험해 보지 못한 연애에 대한 결핍이 여성 혐오로 발전하는 과정이 전혀 새롭지 않다.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는 공통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데 있다. 그런 주입으로 구조를 일궈왔다. 표면상으로나마 가정을 이룬다는 것의 전제가 이런 주입에서 시작됨에도 19세기 후반보다도 존중받지 못하는 21세기 여성의 노동은 심란하기만 하다.


한 해에 할당된 힘든 시기를 함께 극복하고 나면 로라네 가족들은 소박한 선물과 다정한 키스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다. 단위 개념으로서의 가족은 혼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일가를 이루건 반려동물을 들이건 최소의 구성요소가 더해진다. 무엇보다 함께라는 점이 이 구조를 굴러가게 한다.

지금 우리들의 스윗 홈은 공동의 참여와 존중 하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주 또렷하게 반박할 수 있다.





@출처/ 초원의 집, 로라 와일더 잉걸스 (Little House in the Big Woods, Laura Ingalls Wilder, 1932-1971)

초원의 집 1권, 큰 숲 작은 집 (비룡소, 2005, 번역 김석희, 일러스트 가스 윌리엄스 Garth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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