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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11. 2016

사랑의 에반제린,
소년, 소녀를 만나다


작품성이나 주제의식을 떠나 과거 국내 남성 만화가 대부분은 19금 성인극화 시장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순정계에도 인기 남성 작가들은 존재했고 차성진, 김동화, 김영숙, 이보배 작가 등이 그 계보를 잇는다. 김영숙 작가가 막장드라마식 매력의 찍어내기 극화에, 이보배 작가가 약간은 명랑만화 분위기에 치우친 점을 고려해보면 1980년대 순정만화계의 적자는 아무래도 김동화 작가이다.


꼬챙이 같은 다리에 막대사탕 같은 프로포션, 순정만화의 기본 별 박기 눈동자가 아닌 그물치기로 그려진 왕눈. 김동화 작가의 이 시기 화풍은 지금도 독보적이다.

시적인 분위기의 서정적인 학원물 <목마의 시>, <영어 선생님>, <내 이름은 신디>, 전설을 차용한 <전설의 별 시리우스>, <아카시아>, <레오파드>, <사파이어>, 역사물 <멜로디와 하모니> 등 발표하는 작품 대부분이 성공했다. 이런 인기는 1990년대 순정 작가 부흥의 직, 간접적인 터전이 된다.

시그니처 화풍과 팬덤을 선사한 <요정 핑크, 월간 보물섬, 1984-1987>
화풍의 섬세함이 절정을 이룬 <전설의 별 시리우스, 소년 중앙, 1985>


<사랑의 에반제린>은 김동화라는 소년이 그린 소녀감성 자체에 대한 오마쥬이다.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롱펠로우의 <에반제린 Evangelin: The Tale of Acadia, Henry Wadsworth Longfellow>과 종종 인용되던 테니슨의 <이녹 아든 Enoch Arden, 1864, Alfred Tennyson>은 모두 역사의 격랑으로 헤어져 평생을 찾아 헤매는 연인들에 관한 낭만시이다. 두 시인의 특징을 배제하고 줄거리만 보면 애절한 운명만큼 서사도 비슷하다. 여주인공 에반제린의 경우 아예 이 작품에서 따온 이름임을 극 중에서 밝힌다.

스토리는 한승원 작가가 맡고 있지만 모든 페이지마다 김동화의 존재감이 빛난다. 전면을 가득 채운 꼼꼼한 데생, 기이한 프로포션에도 아름다운 인물, 섬세한 컷 분할을 통한 완급조절, 노동집약형 펜터치.. 그야말로 김동화식 소녀감성의 절정을 보여준다.

김동화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한승원 작가가 스토리를 썼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영국 시골 해글리. 코스트 공작가의 일꾼 ‘싱클레어’는 공작의 외동딸 ‘에반제린’과 우연히 마주친다. 아버지가 재혼하자 쓸쓸한 마음으로 귀향한 에반제린. 목적 없던 그녀의 삶은 싱클레어의 배려에 활기를 되찾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공작의 거센 반대로 비밀 결혼식을 올린 둘은 도피를 계획한다. 어린 연인의 계획은 발각되고 싱클레어를 살리기 위해 에반제린은 거짓 이별을 고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파티’ 일행과 미국으로 터전을 옮긴다. 폐인처럼 은둔하던 에반제린은 독립하기 위해 간호사가 된다.

이름처럼 운명적인 조우를 하는 에반제린과 싱클레어
이 시기 화풍의 특징 중 하나인 점묘 스타일로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화면 전체를 이용한 드라마틱한 연출도 즐겨 사용했다.
탄탄하면서도 섬세한 노동집약형 데생으로 전체 화면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선보였다. 어시 애도..
분할 배치를 통한 전개와 감정 묘사도 당시 김동화 작가가 즐겨 사용하던 연출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둘은 수년간 비껴간다. 에반제린에게는 상류층 언론인 ‘레니에’와 ‘앤디’가, 싱클레어에게는 파티가 지속적으로 구애한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엇갈리던 두 사람은 공습 중에 조우하지만 에반제린을 구하다 부상당한 싱클레어로 인해 둘의 만남은 다시 미뤄진다.

추억이 서린 고향에서 싱클레어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그녀에게 날아든 소식은 그의 결혼 소식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러 간 에반제린은 그가 부상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렸음을 알고 절망한다. 에반제린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무심히 시간이 흐르고 싱클레어를 추억하며 스산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에반제린. 그녀의 앞에 과거를,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낸 싱클레어가 찾아온다. 둘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해글리로, 그녀의 품으로.

비극으로 끝난 롱펠로우나 테니슨과 달리 김동화의 연인들은 헤어진 시간을 보상받는다. (상큼했던 싱클레어의 헤어스타일이 하울처럼 변한 것은 무시하자;;)



이름부터 예정된 운명을 짐작할 수 있는 이 연인들의 연애사는 수년을 거쳐간다.

주요 설정상 두 주인공은 작품 내내 헤어져 있기에 초반부가 지나면 로맨스가 주는 감흥이 사그라든다. 이런 약점을 상쇄하기 위해서인지 작가는 다양한 인물을 투입시킨다. 다이슨과 레슬리, 파이어와 리벳 같은 조연들과 에반제린의 계모 마가렛과 부친 그레이엄, 리벳의 부모인 실바와 주르 같은 중년까지 대부분의 인물이 커플링을 이룬다. 모티브가 된 작품들의 애절함을 중첩시키고, 세계사의 격랑 속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구현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투입은 두 주인공의 애절함을 증폭시키기보다는 감정을 분산시킨다. 가슴 아린 초반부가 지나면 남자 주인공 싱클레어의 매력도 가물거리는 마당에 서브 남주들-레니에나 앤디가 발휘해야 할 긴장감은 미적지근하다.

또 주인공들의 극적인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주요 세계사마다 걸쳐지는 우연의 남발도 억지스럽다. 결론에 치달은 상태에서 기억상실증으로 방점을 찍는 반전이 대표적일 것이다. 마치 뻔히 예정된 해피엔딩을 모른 척하며 던지는 인공적인 위기처럼 느껴진다. 다만 당시 인기작들은 대본소 부수를 올리기 위해 편집자들의 주도로 전개가 좌우되기도 했다. 해서 스토리가 늘어진 정황은 단정 지을 수 없다.


다시 절판되긴 했어도 당대의 인기만큼 김동화의 작품은 꽤 많은 수가 복간되었다. 

열 권이 원전인 이 작품은 <롱 롱 러브>라는 제목으로 복간되었지만 역시 절판된다. 또 다른 인기작 <아카시아/복간판 제목: 천년사랑 아카시아>, <레오파드/복간판 제목: 어느 록 가수의 이야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유치한 수준으로 재편집 발행되었다. 구독 연령대를 낮춘 종잡을 수 없는 유치한 스토리와 완성도 떨어지는 화풍이 추억까지 훼손시키는 안타까운 복간본들이다.


<사랑의 에반제린>은 김동화식 소녀감성의 마지막 절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동화 작가는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작가주의적 작품들을 발표한다. <기생 이야기>, <황톳빛 이야기> 등 제목만큼 토속적인 소재를 극도의 단순화된 동양화풍으로 구현한 작품들이다.

변화된 화풍에는 ‘한국형 순정’이라는 극찬이 붙었다. 작가의 이런 도전은 신선하게 느껴지면서도 김동화의 과거 모든 순정물을 부정하듯 지워버린 것 같은 양가감정이 들게 했다.

작가 개인의 행보를 존중함에도 시그니처와 같던 1980년대 화풍이 소멸된 것은 내내 아쉽기만 하다.





@출처/ 사랑의 에반제린, 그림 김동화, 글 한승원

사랑의 에반제린 (프린스, 1988)


요정 핑크 (바다그림판, 2003)


전설의 별 시리우스 (프린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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