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흰 곰과 사랑에 빠진 소녀, 네 방향의 바람, 운명의 여행.
저주에 걸린 연인을 구하는 모험 이야기는 나라마다 존재하지만 매번 북구의 바람을 떠올리곤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카이 닐센 Kay Nielsen이 심어 둔 풍경 때문이다. 오래된 노르웨이 민화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은 어느 목요일 저녁의 쓸쓸한 풍경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이 선택한 여정에는 황량하고, 무자비하고, 다정한 풍경들이 스쳐 지난다. 카이 닐센이 평생에 걸쳐 사랑한 북구의 얼굴이다.
20세기 초 유행한 예술 제본 형태의 고급 출판물들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삽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낭만주의의 낙관 아래 연도 자체에 황금이 발라진 것 같은 이 시기 카이 닐센은 에드먼드 듈락 Edmund Dulac, 아서 래컴 Arthur Rackham 등과 더불어 화려하고 독특한 화풍을 펼쳤다.
타고난 재능에 불구하고도 그의 작품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호화로운 출판물은 사치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후에는 라디오, TV가 미디어를 주도하자 고급 출판물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평생 가난에 시달린 닐센은 빈곤 속에 사망한다. 이 불운한 작가의 작품은 가족들이 필사적으로 소장, 보관해왔기에 남겨질 수 있었다.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 우리들은 밤새워 춤출 수 있다. 2 https://brunch.co.kr/@flatb201/294
<Nielsen's Fairy Tale Illustrations>에는 그의 데뷔작 <In Powder and Crinoline>의 작품이 비교적 폭넓게 실려있다. 그러나 Dover 출판사의 이 보급판은 저가 정책으로 인쇄 상태가 조악하다.
Taschen사에서 발간된 카이 닐센 화집은 손상 부분과 컬러가 대폭 보완되었다. 원전에 충실한 내용이 고풍스럽고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컬러 또한 별색, 금박 등을 적절히 사용해 간소하게나마 골든 에이지 일러스트레이션의 호사스러운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은 로맨스의 여정을 독보적인 화풍으로 그려낸다.
닐센은 우끼요에의 특징을 탁월하게 활용했는데 여백과 구도로 인물의 감정선을 조율한다. 고적한 컬러의 여백은 풍광마다 서정성을 입히고 빽빽한 수직 구도는 주인공의 위기나 비탄을 강조한다. 우끼요에와 비어즐리의 영향을 받은 우아하고 예민한 선, 나른한 캐릭터, 화려한 색감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신비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가을도 저물어 가는, 폭풍우 치는 어느 쓸쓸한 목요일 저녁, 신비한 흰곰이 가난한 농부를 찾아온다. 가정형편을 외면할 수 없던 아름다운 막내딸은 신부가 되어달라는 난데없는 청을 받아들여 흰곰의 성으로 향한다. 지루하고 긴 여행 내내 흰곰은 한결같이 다정했고 소녀는 점점 마음을 연다. 그러나 그녀에게 허락된 그의 모습은 흰곰으로서 일뿐이다. 밤이 되면 흰곰은 사람으로 변했지만 작은 불씨 하나 없는 철저한 어둠 속에서만 그녀를 품었다. 흰곰의 배려로 다시 고향집을 찾았을 때 어머니가 건넨 근심은 그녀의 불안과 의심을 부추긴다.
성으로 돌아온 소녀는 흰곰이 잠들길 기다려 몰래 챙겨 온 양초에 불을 붙였다. 일렁이는 불빛이 확인시켜 준 것은 엄청난 미남이었다. 뜻밖의 아름다움에 충격 받아 물러서던 소녀는 그의 셔츠에 뜨거운 촛농을 떨어트리고 만다. 잠에서 깬 그는 소녀가 믿음을 저버려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 도리가 없어졌다고 슬퍼한다. 괴물 공주와의 결혼을 위해 떠나는 그에게 소녀는 매달렸다. 찾을 수 있다면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성으로 오라는 말을 남긴 채 연인은 사라진다.
다음날 아침 소녀가 깨어났을 때 그들의 안락한 성 또한 연인과 함께 사라진 후였다. 두터운 안개가 짓누르는 깊고 어두운 숲 속, 축축한 이끼 들판 위에는 오로지 그녀 혼자다. 눈물을 거두고 일어선 소녀는 우연히 마주친 친절한 노파들로부터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과와 빗, 물레를 얻는다. 운명의 상대라 할지라도 소녀가 제 때 도착하지 못하면 그를 얻지 못하리라 노파들은 만류한다. 하지만 소녀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친절한 동풍과 상냥한 서풍, 현명한 남풍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러나 셋 중 누구도 그 성이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험악한 인상의 북풍은 ‘그 성’을 알고 있었다. 험난한 여정이 이어지며 북풍조차 지쳐간다. 소녀의 절박함에 북풍은 온 힘을 다해, 자신에게도 너무나 먼 그 성으로 그녀를 데려다 준다.
..북풍은 자신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바람을 약간 휘몰아서 스스로를 아주 딴딴하고 큼직하게 하여 도깨비처럼 보이게 했다.
..북풍은 점점 지쳐갔다. 곧 그는 숨이 차서 겨울바람 한 줄기만 간직했다. 그의 두 날개가 점점 처지더니 마침내 아주 낮게 가라앉았고 파도의 무수한 물결이 북풍의 뒤꿈치에 물을 튀겼다.
북풍이 그녀에게 물었다.
“두려우냐?”
“아니에요”
마침내 연인의 행방을 알게 된 소녀는 그와의 만남을 방해하는 괴물 공주에게 제안한다. 세 가지 보물과 그와의 하룻밤을 교환하자고. 그러나 괴물 공주의 계략으로 연인은 매일 밤 잠들어 있다. 마지막 날 밤, 친절한 시녀의 조언을 따라 괴물 공주가 준 차를 몰래 버린 연인은 소녀와 해후한다. 결혼식 당일, 그는 저주의 촛농이 묻은 셔츠를 세탁해내는 사람과 결혼하겠다 공표한다. 소녀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저주기에 그녀의 손이 닿은 셔츠는 눈부신 흰 색으로 변하며 저주가 풀린다. 뜻을 이루지 못한 괴물들은 스스로의 분노를 못 이겨 소멸된다. 괴물들에 의해 감금된 사람들을 풀어준 후 소녀와 연인은 백마를 타고 떠난다.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이 외롭고 외진 성으로부터 둘만의 행복을 향해.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은 제목만큼 낭만적이고 신비한 서사로 인해 많은 판본이 있는 작품이다.
영국 작가 재키 모리스는 이 오래된 이야기를 사랑에 대한 우화로 각색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동일하지만 가난한 농부는 실직자로, 소녀의 집안은 이민자 가정으로 바꾼 현실적인 설정을 섞는다. 이 야심 찬 설정은 후반부로 갈수록 흐지부지해진다. 그러나 북풍과 소녀의 엇갈리는 감정, 외면받는 트롤 공주의 절망감만은 꽤 설득력 있다. 그중에서도 북풍이 소녀에게 구애하는 장면은 카이 닐센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하다. 재키 모리스의 화풍을 선호하지 않기에 그녀의 각색을 카이 닐센의 그림으로 상상해보곤 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북풍은 험악한 모습 속에 창백한 외로움을 감춘 존재다.
소녀의 용기에 반한 북풍은 자신의 곁에 남아달라고 구애한다. 소녀는 여정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다른 길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북풍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럼에도 이번만은 왕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녀의 여정에 그의 구원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없이 빛을 내며 그녀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백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백곰의 뒤로 창백한 남자의 얼굴이 살짝 비쳤다. 그녀는 가면 뒤에 숨은 북풍의 진짜 얼굴을 본 거라고 생각했다.
거절당한 북풍은 괴로운 마음에도 온 힘을 다해 소녀를 성에 데려다주고 떠나버린다.
소녀가 저주를 풀자 트롤 공주는 사랑받지 못한 절망으로 죽어버린다. 그러나 소녀는 왕자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흰곰에게 의존하던 어린 소녀의 풋사랑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북풍에게 흐르는 자신의 마음을 믿어보겠다는 그녀의 머리 위로 기쁨으로 춤추는 바람이 분다. 아름다운 하얀 매가 되어 북풍과 함께 날아오른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자유와 사랑을 만끽한다.
극 중 조력자 노파는 ‘운명의 상대라 할지라도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얻을 수 없다’며 사랑에는 적당한 때가 중요함을 말한다. ‘각기 다른 모습과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에는 한 가지’란 충고 역시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은유일 것이다.
원전에 충실하건 현대적으로 각색되었건 이 작품에는 언제나 사랑에 관한 여정이 묘사된다. 연인을 찾아가는 여정에 등장하는 네 방향의 바람은 기어코 사랑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결국 내 마음속 바람이 부는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 말이다.
해와 달과 별, 비나 눈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바람을 붙잡아 둘 수 없다. 아무리 먼 곳에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바람처럼 카이 닐센의 이미지 언어는 좀더 사랑받아 마땅할 북구의 풍경을 전파했다. 황금 연도의 대표자이면서도 휘황함에 눈 멀지 않고 호젓한 서정이 담긴 여백에 공을 들였다. 오독되어 온 조연들에게 소외되고 폄하된 역사를 중첩시켜 세계시민적 연대의식과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그 흔적을 더듬다 보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황량함 속에도 사실은 수많은 삶과 치열함이 채워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쓸쓸한 목요일 저녁이면 곱씹게 되는 애수, 어리석은 실수를 딛고 부단히 나아가는 씩씩한 모험이 예리하고 유쾌한 이미지로 벼려져 있다.
불멸의 명예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세속적인 성공을 마냥 폄하할 수 있을까? 후대의 관람자인 우리는 카이 닐센의 진짜 목표를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그려낸 풍경들은 창작자가 꿈꾸는 궁극의 소실점을 엿보게 한다. 그 시선이야말로 이제 막 꺼내 먼지조차 내려 앉지 않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황금이다.
@출처/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 (East of the Sun and West of the Moon)
East of the Sun and West of the Moon (Taschen, 2015, 일러스트 카이 닐센 Kay Nielsen)
Nielsen's Fairy Tale Illustrations in Full Color (Dover Pub, 2006, 일러스트 카이 닐센 Kay Nielsen)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 (국민서관, 2014, 번역 유수아, 일러스트 재키 모리스 Jackie Morris)
에오스클래식 8 고전동화집,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 (현대문학, 2011, 편집 페테르 크리스텐 아스비에른센·외르겐 모에, 번역 설태수·원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