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가 아닌 어떤 부분이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 때가 있다. 그 모습이 나와 닮아도 닮지 않아도 사랑에 빠질 수야 있지만 결국 해피엔딩은 같은 곳을 바라볼 때 얻어진다. 인어공주의 선택은 스스로의 의지였지만 사랑하는 이와 다른 곳을 바라보았던 그녀의 연심은 애달플 수밖에 없다.
신일숙 작가의 단편 <거울 밖의 인어공주>는 낙망으로 굴절된 마음을 비춘다.
신화와 판타지를 바탕으로 한 대표작 외에 신일숙 작가가 시도해 온 장르들은 의외로 폭넓다.
발표 당시에도 흔치 않던 SF물 <1999년 생>, 윤회와 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스릴러 <카르마>, 유쾌한 힐링 소품 <정령을 믿으십니까?> 등 다양한 서사를 다뤘다. 물론 <1999년 생>을 정통 SF물로 보기엔 외피만 차용한 수준이지만 배경 자체는 흔치 않던 선택이었다.
<거울 밖의 인어공주>도 그런 시도들의 연장으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소슬한 분위기의 판타지이다.
기숙학교로 전학 오게 된 ‘나’는 난생처음의 반독립에 들떠있다.
룸메이트인 ‘미화’는 검고 긴 생머리의 미소녀지만 적은 말수만큼 어딘가 음울하다. 언제나 조용한 미화는 딱 한번 격렬한 감정을 내비치는데 인어공주가 부조된 그녀의 특이한 거울을 만졌을 때다.
이후로도 나는 미화와 친해지려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그녀와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다. 시간이 지나 다른 친구들을 사귀게 된 나는 그녀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어느 달빛 휘황한 밤, 문득 잠에서 깬 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미화를 목격한다.
달빛 때문일까.. 평소의 음울한 모습은 찾을 수 없고 거울이 사랑하는 이를 비춰주고 있다 말하는 그녀는 행복에 겨워보인다. 시인이고 류트의 명인이며 일곱 마녀와 싸워 왕국을 구한 용감한 왕자님, 냉정하면서도 정열적인 그분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맙소사!
딱히 들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닌 듯한 자기도취의 사차원 독백을 나는 무시한다. 다음날 미화는 원래의 음울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며칠 후 독감에 걸린 나는 기진맥진 방에 들어선다. 오늘도 거울을 붙들고 있는 미화는 심지어 울고 있다. 자신의 왕자님이 결혼했다는 것이다.
룸메이트여.. 제발! 고열로 짜증스러운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약 기운 속에 잠든다.
그런데 다음날 원인을 알 수 없이 절명한 미화가 발견된다. 그리고 나는 죽은 미화 곁의 거울에 비치는 장면을 목격한다. 분명 결혼식 중인 중세 복장의 남녀가 서약의 키스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현실일 수 없는 이 모든 것은 투병 중 환상이라 치부하며 나는 방을 옮긴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을 보여주지만 반드시 비극적인 결말을 내는 신비하고 잔인한 인어공주의 거울.
창고 속에 박혀 있던 거울은 자신을 발견한 누군가의 마음을 다시 비추기 시작한다.
편차는 있지만 신일숙 작가는 주체적으로 변화하는 여주인공을 즐겨 그려왔다. 기존의 주인공들과 달리 <거울 밖의 인어공주>는 마음속 어둠에 허물어지는 약하고 수동적인 인물을 그리고 있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인어공주의 거울’이라는 점은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거울 앞에 선 것은 자신이기에 거울 속 이미지는 완벽한 일치감을 준다. 그러나 한정적 반사로 이루어진 그 세계는 바라볼 수 있지만 다가설 수는 없다. 자신의 사랑에 스스로를 묻어버린 인어공주처럼 미화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한 마음속 어둠에 잠식당한다.
타인은 온전히 알 수 없다. 내가 목격한 것은 상대의 연대기 중 극히 일부분이다. 부정적인 부분을 목격했을 때 편견이 호의적인 부분을 목격했을 때 환상이 덧씌워진다. 결국 자신이 만든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이 관계의 노선을 결정짓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의 마음은 생각한 방향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만든 이미지에 미혹되어 시선을 떼지도 마음을 거두지도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곳을 떠돌기도 한다.
<거울 밖의 인어공주>는 굴절된 이미지에 잠식당했을 때 예정된 관계의 뒤틀림을 서늘하게 은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고생의 이상형이 타이즈를 입은 중세 왕자님이란 설정이 좀 더 무서웠지만.
@출처/ 거울 밖의 인어공주, 신일숙
월간 르네상스, 거울 밖의 인어공주 (서화, 199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