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고 있는 버려진 곰 인형, 고장 난 채 존재감을 잃고 스러져 가는 것들.
한때는 너무도 애틋했지만 이제는 잊혀진 장면만큼 슬픈 것이 있을까?
버려진 동물들을 목격할 때면 내가 버린 것이 아님에도 매번 너무 아프다. ‘소망이라고는 하나 없는 낙심한 얼굴’*이라는 유기동물에 관한 문장이 두고두고 떠오른다.
<당신이 버린 개에 관한 이야기>는 버려진 존재의 후일담에 관한 애틋하고 아픈 이야기이다.
악의적인 거짓말 같은 상황에 떨어진 이름 모를 개, 애정으로만 구성된 이 존재는 긴 기다림 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품고 떠날 뿐이다.
일러스트레이터 김혜정 작가의 원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짧은 애니메이션은 흑백 소묘로만 그려져 있다.
화사한 컬러 없이도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날리는 계절이 아름답게 스쳐간다.
수묵화의 농담 같은 터치는 담담하고 흐릿한 누군가의 기억을 엿보는 느낌을 준다.
원경으로 바라보는 계절 속에 예정된 비극은 지켜보는 우리도 이 서사의 방조자라고 말한다.
아름드리 나무가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고적한 언덕.
차 한 대가 멈춰 개 한 마리를 내려놓고 사라진다. 무단 투척하는 쓰레기처럼.
무슨 일이지? 왜 나를 데려가지 않는 거지?
있는 힘껏 차를 뒤따라가 보지만 역부족, 떨궈졌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버려진 후 처음 맞이하는 밤. 눈썹같이 가냘픈 달만이 개의 곁에 머문다.
가족이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던 어느 날, 아! 돌아오나 봐! 자동차 소리가 들려.
그러나 무심히 지나가는 다른 차임을 깨닫고 시무룩하게 돌아오는 개.
괜스레 골이 난다. 포르르 거리는 참새떼에게 컹컹거려 본다.
망부석 같던 개가 오늘은 잰걸음으로 움직여 도망친다. 이내 날아드는 돌멩이들.
아, 이런.. 가차 없는 동네 개구쟁이들이다.
분명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에, 한치의 의심을 보태지 못한 채 기다리는 개.
쏟아지는 비와 번개와 천둥을 묵묵히 견뎌낼 뿐이다.
다시 개인 밤, 상냥한 달은 개가 가장 사랑하는 이와 만나게 해 준다.
하룻밤 헛된 꿈일지라도.
어느덧 눈이 날리는 계절, 개의 그리움은 작은 둔턱이 된다.
그러나 이제 달의 도움 없이도 행복한 기억으로 돌아갈 수 있다.
‘유기의 원인이 된 이들’은 이런 글 따위는 읽고 있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비극은 이미 잊은 채 새로운 즐거움에 몰두해 있겠지.
그런 이들과 섞여 살고 있다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기분이 든다.
개를, 고양이를, 동물을 좋아하는 성향과 도덕성은 무관하다. 동물을 사랑하는 범죄자가 있을 것이며,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많은 선한 이가 있다. 악의적인 자기만족을 실현하는 애니멀 호더도 있다.
영화 <화차>에는 유기견을 안락사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스치는 작은 장면이지만 변영주 감독은 이 장면을 찍을 때 평소보다 몇 배의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자신이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런 성향이 살아있는 생명을 다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시이튼은 ‘야생동물의 삶은 언제나 비극적인 죽음으로 종료된다.’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 범주에 유기동물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유기동물이 처한 현실은 근본 없는 분노와 더불어 그 끔찍함이 계속 갱신되고 있다.
그러나 해결 모색에 대한 담론은 게으른 클리셰로 가득할 뿐이다.
휴가철에 많이 버려진다고?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버려진다. 다만 미디어가 휴가철에만 구태의연한 아젠다로 노출할 뿐이다. 이사를 가서, 결혼을 해서, 임신을 해서, OO와 적응하지 못해서.. 정도는 그나마 변명의 형태라도 띄었다. 개가 짖어서, 생각보다 귀엽지 않아서 같은 이유에 담긴 천박함은 이유불문 비난하고 싶다.
생명을 전제로 조금만, 아주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했다면 이 비극에 사연을 보태지 않을 수 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는 그들은 반려동물이 준 온기를 받을 자격이 없다.
이런 논쟁에는 개만? 고양이만? 소는? 돼지는? 닭은? 고아들은? 노인들은?..이라는 한결같이 구태의연하고 질문이 따라온다. 폐기에 가장 가까운 존재들은 서로 닿아있기에 연대하는 이들은 대게 연민을 외면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나 연대보다 혐오의 명분을 원하는 멍청한 이들이 진짜 대답을 원해 저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으로 태어난 우리는 모든 것을 관장하거나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 그럴 권리는 더더욱 없다. 눈부신 문화와 예술을 떠올려봐도 이 지구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는 인간 같다.
다만 우리는 덜 비극적인 공공의 삶을 넓혀가려 노력할 수 있다.
최선은 아니라도 적어도 차악을 선택하려 안간힘 써볼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란 종이 부여받은 특권이지 않을까?
선의라 부르기 힘든 미미한 행동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려는 것.
스스로 가족으로 들인 생명을 방관하지 않는 것.
적어도 우리는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될 수 있다.
한 스푼만큼이래도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출처 및 인용/
당신이 버린 개에 관한 이야기, 김혜정 & 이종혁 (A Story about a Dog Abandoned, 2012)
*소망이라고는 하나 없는 낙심한 얼굴, 강지영 (Oh, Boy!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