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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twhite Sep 20. 2022

신은 어디에나 있다

우붓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새끼 고양이가 가녀린 울음소리를 내며 발코니를 찾아왔다. 고양이가 머리를 숙여 코끼리 신 조각상 아래 고인 빗물이 마신다. 배가 고픈 것 같아 지난밤 남은 나시고랭을 꺼내어 줘 봤지만, 음식에는 흥미가 없는 듯 물만 마시고 돌아갔다. 발코니로 나온 김에 의자를 닦고 명상을 시작한다. 오늘 아침은 이전과 다르게 좀 후덥지근하다. 목 근처로 땀이 맺히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명상을 계속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난다.

숙소 발코니에 코끼리신 조각상


식당으로 내려가 호텔 직원이 추천한 따뜻한 발리 전통차와 과일을 먹는다. 오늘 아침은 바나나 팬케익이지만 정말 먹어본 팬케익 중 제일 맛이 없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정면을 응시한다.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느끼는 촉감과 탁 트인 풍경, 그리고 파파야의 맛을 느끼며 지금 이 순간을 기억과 느낌으로 새긴다. 오감으로 느끼는 이 순간을 한국에 돌아가서도 느낄 수 있길 바라본다. 과일과 차만 마신 후 호텔을 나와 우붓 상점거리로 산책을 나선다. 산책 후에는 브라우니와 카페라테를 마시기 위해 어제 저녁에 찾아둔 베이커리로 갈 예정이다.


우붓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만큼 외국인의 취향과 입맛에 맞춘 식당들과 상점들이 즐비하다. 발리의 전통 주택과 모던한 스타일의 상점이 교차를 이루는 거리는 색다른 이색감을 준다. 우붓은 높은 건물이 없어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이 있다. 정말 사람이 사는 공간 같다. 서울과 같은 도시가 주는 느낌과는 무척이나 다르고, 알 수 없는 에너지들로 꽉 차 있는 듯하다.

꽃과 과자로 가득찬 짜낭사리

발리는 아침에 길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이 짜낭(제물을 뜻함)을 놓고 신께 간단한 제를 올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발리는 신의 나라라고도한다. 그만큼 곳곳의 사원도 있고, 집에 자신이 모신의 신을 위해 개인 소유의 사원을 만들기도 한다. 또,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신 조각상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신의 나라답게 어느 곳에나 신이 있다. 나는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신이라는 개념을 이해한 적도 없고, 신을 모신다는 것이 체감적으로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어느덧 베이커리에 도착했다. 문 여는 시간에 맞춰와 내가 첫 손님이다. 아이스 카페라테와 브라우니를 주문하고 가게 밖 테이블에 앉는다. 내가 찾던 그 꾸덕한 브라우니다. 나는 알 수 없는 전율과 함께 감사함을 느낀다.


누군가 나에게 신의 존재를 믿냐고 묻는다면, 우붓에 온 이후에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한국에서 나의 삶의 대부분은 계산을 통해 수치를 도출하고, 그 수치들로 현상을 증명하며 논문이나 보고서를 쓰는 일에 썼다. 나에게 감성은 있어도 종교와 신은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나의 결핍을 쏟아내며 그 안에서 찾은 것은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나의 신이었다. 무너져가는 나를 잡아준 내 안에 신은 나를 지탱해주고 안정감을 준다. 명상을 할 때도 나의 중심을 느낄 수 있고, 이전의 나 자신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붓 온 날, 한국은 백 년 만에 가장 큰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9월 10일 추석, 나의 생일이었다. 보름달을 발리에서라도 보고 싶었지만, 그날은 저녁 내내 비가 와 볼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보름달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요가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마사지를 받아볼까 하고 나선 길에 건물 틈 사이로 무엇인가를 보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보름달. 발리는 모두 높이가 비슷한 낮은 건물이고 달도 낮게 뜨기 때문에 건물에 가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마사지 가게를 찾아가는 동안 보름달이 계속 함께했다. 그리고 마사지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 보름달이 가게 위에서 또렷이 보였다. 원하는 대로 보름달을 보았다. 나는 가슴 벅참과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하루 늦은 보름달

우붓에서 음식이 맞지 않고 고생하던 날 저녁, 뜨근한 국물에 라면이 먹고 싶었다. 한참을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다 자포자기하고 들어간 한가한 그 음식점에서 라면을 팔고 있었다. 한국의 매운 라면과 달랐지만, 발리에서 가장 맛있고 만족스러운 최고의 식사를 했다.


숙소에 바퀴벌레가 나온 날, 해충 스프레이가 떨어진 참이었다. 결국 벌레는 잡지 못했고 숙소 직원은 바퀴벌레를 또 보게 되면 찾아오라는 말만 남긴 채 내 방을 떠났다. 마음속으로 사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20분 뒤에 직원은 나의 바람대로 새로운 스프레이를 사들고 내 방을 찾아왔다.


꾸덕한 브라우니와 카페라테가 먹고 싶었던 나는 한 번에 이곳을 찾아냈다. 그리고 지금 브라우니를 먹고 있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손쉽게 내 앞에 나타났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한국에서는 안되던 것이 이곳에서는 쉬웠다. 발리의 신들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일까. 내가 내 안의 무엇인가를 찾아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인생의 회의로 가득 찬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곳에 와서 나는 매일이 기대된다. 오늘은 또 어떤 선물을 받게 될까, 내가 오늘 얻어갈 지혜는 무엇인가. 설렘으로 가득 찬 삶을 기대하게 됐다. 이것이 신의 축복일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신이 찾길 원한다면, 당신은 신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은 어느 곳에나 있다. 발리에 곳곳에 서있는 신의 조각상들처럼 그들은 우리 주변에 있다.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신은 당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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