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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twhite Oct 30. 2022

달콤한 게으름

Dolce Far Niente(돌체빠르니엔떼)

나와 일을 해본 지인들에게 내 성격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열의 열한 명은 급하고 다혈질이고, 주관이  사람이라고 답할 거다. 나도  성격이 급하고  빠르게, 속도감 있게 살고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산책을 좋아하지만 주변을 즐기며 걷기보다는 빠르게 걷고, 학생 때는 느리게 먹던 밥도 아저씨들이 주류인 회사에 오고 나서 그들의 템포를 맞추다 보니 이제는 아저씨들보다도 빠르게 먹는다. 회사에서도 느린 직원과 함께 일하는 것은 상극이고, 그들과 얼굴을 자주 붉히기도 한다. 주말에도 아침 7시에 일어나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해야  일들을 미리 정해두고 하는 편이다. 나에게 ''이라는 개념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누가 쫓아온다고 속도감 있게 계속 달리기만 했던 것일까.


'Dolce Far Niente(돌체빠르니엔떼)'


'Eat Pray Love'에 나오는 대사다. 그 뜻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이라는 뜻으로 일상을 여유롭게 즐기라는 이탈리아 말이다. 영화에서는 ‘달콤한 게으름’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일은 시간낭비라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전 직장에서는 동시에 여러 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보니 스케줄 관리가 가장 중요했다. 대학원도 일과 병행하다 보니 늘 시간을 쪼개서 살아야 했고, 퇴근하면 남는 시간에 과제를 하거나 논문을 봐야 했다. 이런 스케줄로 10년 이상을 지내다 보니,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것은 내게 큰 죄를 짓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더 나아가 지하철로 이동하는 시간에도 책을 보거나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잠깐의 시간도 무엇인가로 채워야만 잘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강박이 나를 늘 불안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든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발리에서는 에너지가 부족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의식적으로 느리게 일상을 보냈다. 오토바이를 빌려 로컬처럼 빠르게 이동해서 여러 관광지를 둘러보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느리게 걷고, 하나하나 눈에 담고 느끼며 삶의 속도를 확 낮추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아침도 10분이면 먹을 음식을 느긋하게 맛을 음미하고 풍경을 바라보며 1시간 동안 먹었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이상 1시간 동안 밥을 먹는 일이 없었다. 조금만 속도가 붙으려고 하면, 입에서 저절로 Dolce Far Niente를 중얼거리며 속도를 늦추고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려고 애썼다. 거리를 걷다 힘들거나 지치면 숙소로 돌아와 몸을 쉬어주고 기운을 차리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느 목표점을 설정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극한의 생존 모드에 나를 맞추고 살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느리게 사는 일상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를 위해 웃어주는 서버의 표정, 아기자기한 우붓 상점들과 발리니즈의 일상, 길거리에 퍼지는 발리의 음악, 다른 관광객과의 낯설지만 즐거운 이야기와 같이 속도감 있게 살았다면 쉽게 놓쳐버렸을 것들이다.  

꾸따 숙소,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조식

우붓에서 3일을 보내고 바닷가인 꾸따로 이동했다. 꾸따에서는 우붓 숙소에서 지불한 1박 금액에 3배를 더 주고 좋은 호텔을 예약했다. 우붓 숙소에서처럼 바퀴벌레가 나올 염려 없이 호텔에서 수영도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도 자고 싶었다. 모처럼의 휴가를 휴가처럼 사치스럽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태어나 처음으로 룸서비스를 시켜보았다. 나가서 식당을 찾아 들어갈 기운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인도네시아라 그렇게 비싼 편도 아니라 부담이 없었다. 토마토 스파게티를 주문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 한국에서는 프로젝트를 마감하거나 대학원 방학을 하면 하던 행동이다. 보통 6개월, 1년 주기를 갖고 하는 루틴이었다. 스파게티를 가져다준 직원에게 팁을 주고 평소 보지도 않는 드라마를 보며 느긋하게 저녁을 먹었다. 별 재료도 들어있지 않은 스파게티를 보고 실망했지만, 그 맛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호텔 수영장 베드에 누워 석양을 바라보다 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꾸따에서 첫날밤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흘려보냈다. 누구는 발리까지 가서 호텔에만 있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의 이 속도가 좋다.

꾸따에서의 석양

삶의 변화를 꿈꾸는 요즘, 어제와 같은 행동,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와 같은 오늘, 미래를 살 테니 말이다.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나의 행동들이 변화를 이끌어가는 부스터가 되어 삶의 방향을 확 틀어놓거나 빠른 물살을 탔으면 좋겠다. '빠른'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마음속 깊이까지 속도를 늦추지는 못했나 보다.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며 엷은 웃음이 지어진다. 어제와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위해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면서 느린 일상을 보내고 싶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시간을 보낼지라도 더이상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 행복, 사람을 놓치며 살고 싶지 않다.   





#발리 #일상 #행복 #여행 #삶 #속도 #스트레스 #우붓 #꾸따 #30대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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