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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근 Apr 14. 2024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공간편 2

(전편 계속)


  반면, 의외의 장소에서 환대를 받는 경험도 있었다.


  6개월이 된 아기와 단둘이 도전했던 첫 외식.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한 데다 밥을 차려먹을 시간도 기운도 없었다. 시켜 먹자니 1인분에 붙는 배달비도 아깝고 아무도 뭐라 하진 않지만 일도 안 하면서 매번 시켜 먹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청승스러운 마음을 떨쳐내고자 매번 테이크아웃만 하던 아파트 상가 김밥집을 찾았다. 그날따라 꼭 누가 차려준 따뜻한 밥이 먹고 싶기도 했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도 모를 아기에게 "엄마 밥 먹는 동안만 기다려줘" 주문을 연신 외며 호기롭게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아기는 새로운 환경이 신기한지 두리번거리며 가게 안을 살폈다. 언제 울음을 터뜨릴지 모르는 아기의 유아차를 앞뒤로 흔들며 마음이 분주했다. 이놈의 오므라이스는 밥을 지어서 하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시계를 봤을 땐 겨우 6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기는 준비된 메뉴가 나올 때까지 울지 않았다. 밥을 세 술 정도 떴을까. 이 정도면 매일 나와서 모든 메뉴를 한 가지씩 먹어봐도 되겠다 생각하는 순간 아기는 보채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라 대부분의 테이블이 비어있었지만 맞은편에 식사 중인 손님이 한 명 있었다. 아기를 달래서 빨리 먹고 가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아무리 궁둥이를 두드리고 아기를 흔들어도 아이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네이트 판에서 본 것처럼 이웃의 식사를 방해하며 뻔뻔하게 밥을 먹는 맘충이 될 것인가. 개념 있는 척하며 첫끼를 포기하고 일어나는 지성인이 될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통제가 어려운 아기와 함께 밖에 나가면 다른 사람에게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마음이 드니까. 그건 언젠가 나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작은 인간에게 짜증 섞인 눈초리를 보내고 그 부모를 손가락질하는 마음을 가졌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저기, 죄송한데 여기 포장 좀 해주세요." 하는데 맞은편 손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신 거면 괜찮아요. 힘들게 오셨을 텐데 식사마저 하고 가세요." 잠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동방예의지국의 어미가 아닌가. 잘 모르는 사람의 환대를 넙죽 받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너무 울어서 죄송해서요." 이번엔 가게 사장님이 거들었다. "집에 가면 더 못 먹어요. 우리도 경험이 있어서 알아요. 그냥 여기서 천천히 먹고 가세요." 나는 마지못한 척 어리숙한 인사를 건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시 숟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는 동안 손님과 가게 사장님이 내가 앉은자리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들은 함께 아기를 봐줬다. 다시 한번 편하게 식사하라는 말과 함께. 나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오므라이스와 함께 나온 가락국수국물을 삼켰다. 평소엔 있는 줄도 잘 몰랐던 목젖이 탱탱해져 아팠다.


  내가 경험한 환대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안다. 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 슬퍼졌다. 주변에 어린아이를 키우는 사람들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어린 아기를 데리고 밖에 나가는 것은 여러모로 힘들다. 챙겨야 할 짐도 많고, 아기의 낮잠 시간이나 배변도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데리고 외출했을 때 마땅히 갈만한 공간이 없다. 백화점, 마트, 키즈카페를 제외하면 수유실이나 기저귀갈이대가 준비된 공간을 기대하기 힘들다. 유아친화적인 시설을 포기하고 집 밖을 나서도 아기가 울어버리면 왜 나왔냐는 눈총을 받는 것 같다.


  요즘 사회적 문화의 흐름이 그런 것 같다. 아기는 아기들끼리. 장애인은 장애인들끼리. 노인은 노인들끼리. 남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외출을 잘 안 하게 된다. 가뜩이나 출생률이 저조하다는데 밖에서 아기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이 공간을 설계할 때 지금보다 더 아기나 아기를 돌보는 사람을 제외하고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이는 아기와 함께 외출하는 사람을 타깃으로 하는 상업화를 부추긴다. 결국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게 되고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겠지만 저출산의 한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악순환은 반복될 것만 같다.


   거대한 물결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무기력하다. 하지만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작은 목소리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거대한 물결을 막아낼 순 없겠지만 흐름을 어느 정도는 바꿀 순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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