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으로 가는 지름길. 의사의 표현대로 하면 하이패스. '그것'을 위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 생리 이틀차에 다시 병원에 방문했다. 임신 호르몬 추적을 위한 혈액검사를 실시하고, 난생처음 호르몬 주사를 맞았다. 엄지와 검지로 뱃살을 집어 배와 수직으로 주사를 놓으면 피하지방에 약제가 투입된다. 주사는 2대. 한 달에 하나만 자라서 배출하던 난자의 개수를 늘리는 주사와 어렵게 성숙시킨 배란이 되지 않게 방지하는 주사였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통 일주일에서 10일 정도 맞고 시술 36시간 전 배란유도제를 맞으면 주사는 끝이라고 했다. (자연주기 방식에 비해 인공주기방식은 생리주기 조정도 필요해서 소요기간과 주사가 더 많다고 한다.)
혼자 주사를 찌르는 것도 무섭고, 평소 손만 대면 뭐든지 망가뜨리는 곰손인 배우자에게 주사를 부탁하는 건 더 무서웠다. 집 주변에는 주사만 놓아주는 병원이 없어 집에서 30분 거리인 난임병원에 매일 주사를 맞으러 다녔다. 마지막 주사를 맞고 36시간 뒤에는 난포가 터지기 전 지체 없이 난자를 채취해야 했다. 의학의 기술을 빌리면서도 임신이 가능한 시기를 인간이 선택하기 어렵고 한 달에 한 번 자연의 이치에 따라야 한다는 점이 당연하면서도 경이롭게 느껴졌다.
질벽에서 난소가 있는 대각선 방향으로 주사를 찌르고 난포액을 뽑는다고 했는데 상상을 하니 끔찍하고 무서워서 마취 전 온몸을 벌벌 떨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회복실이었는데, 건강검진 위내시경을 하고 나왔을 때처럼 넓은 공간에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5~10분에 한 명씩 난자채취를 하고 나온 환자가 계속 추가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6번째 시술자인 듯했다. 구석에서 휴지로 눈가를 찍으며 울고 있는 여성, 큰 목소리로 "하나도 안 아픈데?" 통화하는 여성, 통증이 밀려오는지 신음하는 여성, 피곤한지 잠을 청하고 있는 여성, 간호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여성. 여기가 말로만 듣던 인간공장인가. 웃음이 터졌다.
그것도 잠시, 수면마취 덕분에 시술 중에는 몰랐던 통증이 의식이 돌아오면서 점점 커졌다. 이부프로펜 계열 진통제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아세트아미노펜 계열 진통제를 맞아도 효과가 없어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다. 시험관 시술 통증은 랜덤이라던데 왜 하필 나일까. 1시간만 회복하고 집에 간다고 설명을 들었었는데, 모든 시술이 끝나고 혼자 남겨진 후 2시간을 더 회복하고 난 뒤에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몸을 굼벵이처럼 구부리고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썼다. 머리도 지끈지끈한 데다 몸이 젖은 빨래처럼 무거웠다. 즐겨보던 티브이 프로그램도 인스타그램 피드에도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 한참을 뒤척이다 체중계 위에 올라가 봤더니 시술한 지 24시간도 안 됐는데 몸무게가 5킬로나 불어있었다. 난소과자극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지속되는 통증과 잇따른 부작용에 병원에 전화를 걸었더니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대신 채취된 난자가 예상보다 2개가 더 나와 6개라는 소식과 그중 4개가 수정란 배양에 성공해 2개는 3일 배양 신선 이식을 할 수 있고, 나머지 2개는 5일 배양 냉동 이식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다음 차수에는 이 기분 나쁜 난자 채취 과정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통증도 참을만하게 느껴졌다.
난소가 이미 과자극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냉동 수정란의 상태가 좋지 않아 난자 채취 3일 만에 신선 이식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 앞서 내가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은 '오줌'이었다. 시술 한두 시간 전 물 1리터를 마시고 소변을 참아야 한다. 평소 액체를 잘 마시지 않아서인지 내 방광은 1리터의 물을 견디기에 버거웠다. 마치 방광 두께의 얇음이 느껴지는 느낌. "선생님, 방광이 터질 것 같다 못해 아파요. 시술이 20분이나 남았는데 어떡하죠!" 간호사는 최후의 보루라며 '소변 끊어 싸기'를 가르쳤고 나는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어떡하냐고 울부짖었다. 간호사는 절실함이 도와줄 거라는 위로를 건네며 화장실 안에 있는 내게 성공했냐고 세 번이나 물었다. "김일영님! 1/3만 비우셔야 해요. 김일영님! 다 싸시면 안 돼요! 김일영님! 괜찮으신가요?" 이후의 대화는 수치스러워서 더 이상 옮기지 않기로 한다.
시험관 1회 차만에 임신에 성공했다. 기쁜 마음도 잠시 두 번째 혈액검사에서 호르몬 수치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남을 알게 되었고 착잡한 마음으로 유산을 받아들였다. 배우자와 그동안 고생했다며 서로를 위로하며 피자파티를 하려는 순간 엄청난 복통이 찾아왔고 정신을 잃었다. 하얀 방진포를 입은 구급대원 세 명이 이동식 침대를 통해 나를 안방에서 앰뷸런스로 이동시켰다. 코로나 상황이라 세 번의 시도 끝에 3차 병원 응급실에 당도했다. 받아주는 병원을 찾는 동안 소방관들은 급작스런 고열로 응급진료를 받지 못할까 봐 추운 겨울에 창문을 열고 달려 체온을 떨어뜨려주셨다.
정신이 아득할 만큼의 복통은 지속되었고 혈압이 떨어졌다. 유산이 예상되지만 임신인 상황이라 타이레놀 외 약물은 처방받지 못했다. 5일 내내 초음파로 확인한 결과 오른쪽 나팔관에 자리 잡은 수정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단명은 난관임신을 통한 혈복강. 혈관에 있어야 할 혈액이 복강에 고여 있는 상태로 출혈성 쇼크 등을 일으킬 수 있는 응급상황이라고 했다. "아가, 넓은 자리를 두고 왜 여기에 와 있었니. 오래 품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전신마취를 하고 배에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난관을 절제하고 뱃속에 고인 피를 모두 닦아냈다. 수혈을 받아야 할 빈혈 수치가 나왔다. 회복과 치료에 몰두하다 보니 유산이 되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지나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음의 저울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두 번째 임신도 유산. 원인은 고사난자였다. 차라리 임신이 되지를 말던가. 의사는 자연유산을 기다려도 되지만 좀 더 확실하게 자궁벽을 정리해야 다음 임신에 도움이 된다며 소파술을 권유했다. 연이은 시술과 수술. 축난 몸만큼이나 쪼그라든 마음이 정신을 잠식해 왔다. 평소 같으면 우울한 마음이 들기 전 일을 열심히 하거나 운동을 해서 몸을 움직였을 텐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장거리로 병원을 오가기 힘들어 난임휴직을 했고, 즐겨하던 테니스도 의사가 임신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과격한 운동이라 하여 그만둔 지 오래였다. 임신 소식을 기다리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마음은 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점점 이불 밖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배우자가 출근하고 남겨진 시간에는 가끔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몸이 회복되는 동안 요가 수업을 신청하고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다. 선생님을 따라 요가 동작을 따라 하고 천천히 숨을 쉬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좋았다. 땀을 흘리고 나면 '무언가 했다'라는 감각에 뿌듯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내 안에 쌓여있던 말들이 둑이 터지고 물이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그렇게 완성한 글을 사람들 앞에 내놓으며 치유의 경험도 했다. 마치 상처를 공기 중에 꺼내어 두면 딱지가 생기고 상처가 아물듯이. 마음의 질량이 점점 가벼워지며 하고 싶은 일도 하나씩 생겼다. 좋은 식재료를 구입해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있는 접시 중 가장 예쁜 곳에 담아 먹었다. 매일 세끼를 나에게 대접하다 보니 스스로가 귀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병원을 옮겨 딱 한 번만 더 시술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혹시 실패해도 괜찮아. 할 만큼 했으니 더 이상 미련 갖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