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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vus Oct 11. 2020

23. 점점 기대를 잃어가다

영재의 미성취

  영재가 모범생이라는 인식은 수많은 영재를 적절한 교육과 처방에서 멀어지도록 만들고 있다. 미성취 영재란 잠재력에 비해 성취가 낮은 상태인 영재를 뜻한다.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나, 전체 영재 중 대략 15~50%가 미성취를 나타낸다고 인식되고 있다. 1) 미성취 영재는 그 재능으로 사회에 큰 공헌이 가능하지만, 생산적으로 재능을 사용하지 않아 사회적 손실이 크다고 판단되며 2), 무엇보다도 영재 본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하락한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과거에 이루어진 영재 연구의 주류는 성취 영재에 대한 연구였다. 더불어 한국의 영재교육은 성취 영재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미성취 영재는 소외되고 있다. 3)


  미성취 영재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분석과 적절한 처방은 무엇일지 점점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재가 미성취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왜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자기가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하는가?" 많은 조건을 단순화하여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마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그리고 성격에 따라 수많은 답이 나올 것이다. 결국은 영재도 비슷한 이유에 의해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다. 영재는 높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성취로 이어질 수 있는 함정이 곳곳에 잠재하고 있다.  




해보고 싶은 것도, 시간도 많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너무나 지루했고, 직접 해보고 싶은 것들은 너무나 많았다. 영재인 나를 믿고 지지해준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계셨고, 나의 개인적인 성향을 고려했을 때도 학교를 벗어나는 선택이 옳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은 학교를 벗어났다. 학교를 벗어나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말 길어졌다. 하루의 24시간을 내 의지대로 보낼 수 있었고, 수능이라는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최소 2년, 3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하루를 내 의지대로 보낼 수 있게 된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앞선 글에서 소개했던 배양 기술을 실험하는 것은 물론, 전자 회로를 꾸미고, 미생물 실험, 화학 실험을 하고, 식물을 키우며 시간을 보냈다. 해보고 싶은 실험이 정말 많았고 그런 것들을 찾아보고 탐구할 시간도 충분했다. 의무가 사라진 나는 일어나면 취미생활을 즐기고, 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인터넷에 접속하고, 다시 취미를 즐기는 일상을 보냈다. 


  나는 그렇게 시간이 많았고, 또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수능을 대비한 공부에 관한 생각은 다음 순위로 미뤘다. 당장 수능을 걱정하기에는 아직 두 번의 검정고시가 남았고, 수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능 공부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이런 생각은 수능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하지 않은 결과, 자퇴 후 1~2년이 지나도록 자세한 계획이나 목표는 물론 수능이라는 시험에 대한 어떠한 체계도 갖고 있지 않았다. 가고 싶은 대학은 막연히 가장 좋은 학교였다. 계획도 막연하게 1년이나 2년 정도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수능을 보기 위해서 어떤 과목을 선택해야 하는지 (심지어 과목을 선택해야 하는지조차) 몰랐고, 수능의 출제 범위가 어떤지도 몰랐다.




서서히 꺼져가는 빛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능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길었다. 다양한 고민을 제쳐두고 일단 마침내 얻은 자유를 즐길 만큼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제는 해야 한다'라고 느껴질 때쯤이면 이미 늦은 법이다. 아버지께서는 2010년대의 입시를 거치지 않으셨지만, 아마 긴 삶의 지혜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수능 준비는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특히나 학교를 자퇴하며 내 입으로 대학교에 일찍 진학해 당신의 은퇴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적 부담을 덜겠다고 선언했으니, 그 기한에 맞추려면 당장 조금씩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선 내가 천천히 입시에 대비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당시에 어떤 심정을 가지고 계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추측하건대 내가 아직 어린 나이라는 점까지 고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로만 권해주시고는 했다. 마냥 학원과 공부를 강조하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안목을 넓힐 수 있도록 강연에 참석할 기회와,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님들을 뵙고 기업체를 구경할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해주시며 많은 도움을 주셨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노력을 배신했다. 오직 내가 하고 싶은 것만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도와주려는, 그리고 권장하는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 이때의 나는 정말 순수하게 '하고 싶은 것'을 좇아 움직였다. 대학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도, 스스로 자만해서도, 혹은 수능 공부가 너무나 버거워서도 아니었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저 미루기만 하는 일상이었다. 물론 대학에 가기로 약속한 날까지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조금씩 수능을 준비할 계획을 세우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막연하게 세운 목표인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계획이었고, 그런 계획마저도 잘 지키지 않았다.


  이렇듯 학교를 자퇴한 이후 내 환경은 미성취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었다. 자아 개념이 낮고, 외적 통제가 사라졌으며, 학습 전략이 미숙했고, 현실적인 목표가 없었으며, 동기가 부족했다. 1) 더하여 다양한 분야에 대한 넓은 관심, 힘겨운 친누나와의 관계는 학업이라는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미성취의 원인이었다. 4)


  나의 이런 모습에 아버지는 서서히 기대와 요구를 줄여나갔던 것 같다. 자퇴 후 2년간 이룬 것이라고는 언제 응시했어도 합격할 수 있었을 중졸, 고졸학력 검정고시 합격증뿐이었다.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며 내가 과거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는데도 부모님께서는 내게 어느 정도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꾸준한 관심과 응원을 보여주셨다. 정말로 큰 문제가 시작된 때는, 내가 빛을 잃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순간이다. 




References

1) 송수지. "미성취 영재와 성취 영재 간의 개인적 특성 비교." 아동학회지 28.5 (2007): 175-191.

2) 김정휘, 주영숙, 문정화, 문태영. "영재학생을 위한 교육: 교사와 부모를 위한 지침서" 박학사 (2004)

3) 한기순, and 신정아. "성취영재와 미성취영재는 어떻게 다른가?: 학습전략, 동기, 능력신념, 그리고 문제해결성향의 차이분석." 영재교육연구 17.1 (2007): 27-50.

4) 우희진, "우리가 몰랐던 영재 이야기", 홍익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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