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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vus Oct 25. 2020

25. 방 안에 갇혀서

단절


  지옥에서 벗어났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지만, 출구인 줄 알고 나갔던 곳에는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이번 지옥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내가 만든 지옥이었다는 점이 달랐다. 드디어 벗어났다는 일말의 기쁨도 있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트라우마


  강렬한 기억은 모든 물건에 스며들었다. 집에서 함께하는 물건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떠오르게 하는 방아쇠가 되었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하면서 그런 물건과는 멀어졌고, 중립적인 물건으로 나의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은, 물건은 그저 방아쇠였을 뿐, 발사되는 총알은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렬한 기억은 물건을 상징으로 삼아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매일 밤 악몽을 꿨다. 친누나와 말다툼을 하거나, 싸우는 꿈이 대부분이었다. 친누나를 살해하는 꿈을 꾸는 날도 있었다. 꿈에서 발을 참과 동시에 발로 이불을 차며 깨어나거나, 소리를 지르며 눈을 뜨는 날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잠에서 깨지 않고 조용히 눈을 뜨더라도, 너무나 생생한 꿈의 내용에 잔뜩 기분이 나빠진 채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증상 역시 '트라우마'라는 것은 훨씬 시간이 흐른 뒤에, 대학교에 입학한 뒤 받은 심리 검사에서 알게 되었다. 국가 트라우마 센터 1)에서는 트라우마의 자가진단을 위해 다음과 같은 5개의 질문을 하고 있다.


1. 그 경험에 관한 악몽을 꾸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그 경험이 떠오른 적이 있었다.

2. 그 경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그 경험을 떠오르게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였다.

3. 늘 주변을 살피고 경계하거나, 쉽게 놀라게 되었다.

4. 다른 사람, 일상 활동, 또는 주변 상황에 대해 가졌던 느낌이 없어지거나, 그것에 대해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5. 그 사건이나 그 사건으로 인해 생긴 문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위 질문에서 2개 이상 해당한다면 주의가 필요하고, 3개 이상이라면 심각한 수준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나는 5개 모두에 해당되고 있었다. 매일같이 악몽을 꾸며 일어나고, 전부 잊어버리기 위해 애쓰고, 모든 것에 예민해졌으며, 원망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원망했다. 조금 나아졌지만,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여전히 종종 악몽을 꾸고 있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원망이나 죄책감을 느낀다. 아직도 간이 정신진단검사(KSCL95)를 받으면 우울 항목보다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항목의 T점수가 더 높게 나오곤 한다.




단절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모든 것과 단절되었다. 가장 단순히 생각하면, 내가 취미로 즐기던 것을 더는 즐길 수 없게 됐다. 평소에 하던 실험을 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공간과 장비가 필요했는데, 내 공간이 된 좁은 집에선 그런 실험을 할 수 없었다. 내 집에는 몸을 뉠 공간과 책상, 그리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약간의 공간만이 있었다. 


  가장 큰 단절은 내 주변에 생명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집에 잠깐 들렀지만 내가 집에서 살던 때만큼 오래 보기는 어려웠다. 독서실까지 걸어가며 종종 만나던 친구도, 독서실에서 지나치던 사람도, 식당에 들어가며 인사하던 아주머니도 만날 일이 없게 되었다. 온종일 입으로 소리를 낼 일도, 누군가가 낸 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채로, 나는 나만의 성을 견고하게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대화하는 사람은 나와 뜻이 맞는 극소수 친구들과 부모님이 전부였다. 당연하게도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평균값'의 기준은 점차 나 자신으로 맞추어지게 되었다. 그 성에 틀어박혀 지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각뿐이었다. 다시는 멈추지 못할 무한한 생각의 굴레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References

1)https://nct.go.kr/distMental/rating/rating02_1.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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