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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vus Oct 30. 2020

27. 이미 죽은 나

도피처


  우울증의 늪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가끔은 미래를 상상하고는 했다. 어찌 되었건, 연구자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가졌고, 그를 위해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간다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군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한국에서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내가 연구하고 싶은 분야는 순수과학에 속해 있었다. 사실 꽤 어릴 때부터 순수과학을 연구하기에는 한국이 불모지라는 말을 들었고, 한국보다 더 좋은 연구 여건이 있는 나라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국을 떠나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우연히도 스마트폰 잠금 앱에서 영국 유학 박람회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영국의 입시 체계는 나를 사로잡았다.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이 선택한 과목을 대학 교양 수준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한국의 수능에 해당하는 시험에서는 지원하고자 하는 학과에 맞추어 필요한 과목을 3개 정도만 응시하면 충분했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을 골라 깊게 공부하고 그 성적으로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제도는 정말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영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내게 더 좋은 일이라고 믿었지만, 수많은 위험부담을 안고 이 길로 뛰어들 만큼 확신과 의지가 있지는 않았다. 나는 애써 외면하려고 했지만, 그저 수능을 보기 싫기 때문에 유학에 도전해보려 한다는 사실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도피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성공한다면 내 꿈에 한 발짝 크게 다가갈 수 있는 훌륭한 도피처를 찾은 것이었다.




나를 직시하다


  도피하려는 목적이 있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굉장히 열정적으로 영국 대학에 진학할 방법을 찾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진해서 입시 설명회에 찾아가고 영국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을 찾아 부모님께 보내달라고 말씀드렸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일은 웬만해서는 말리지 않는 성격이셨고, 내가 직접 학원에 보내달라고 하면서 열의를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학원에 가도록 해주셨다.


  그렇게 찾아간 학원은 학교를 그만둔 지 3년 만에 다시 노출된 사회였다. 학원에 가며 주관적으로만 보던 나 자신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 3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변해있었다. 먼저, 나는 자퇴생이었다. 학원의 반 배정 시험을 통해 능력을 증명하기 전까지 학원의 태도에는 '오지 말아라'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특별히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자퇴생은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직접 느낀 첫 순간이었다.


  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때도 이 즈음이었다. 돈만 있다면 영국 대학 입시에 도전하는 과정은 수능과 비슷했다. 기숙 학원에 가는 것처럼 영연방에 속한 국가에서 공부하고 영국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한국 입시보다 쉬운 제도도 있었는데, 세계 대학 평가에서 한국의 명문 대학으로 알려진 대학보다도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영국의 대학에 사실상 돈만 내면 진학할 수 있는 제도도 존재했다. 당연히, 이런 제도를 활용하려면 많은 돈이, 평범한 중산층은 부담하지 못할 액수의 돈이 필요했다. 정말로 원했던 일을 돈이 없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첫 경험이었다.


  사람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성격은 긴 시간 외로움 없이 나 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줬다. 문제는, 그 시간을 거치며 사람과 어울리는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학원은 5명 정도의 학생이 모여 한 반을 이루는 구조였다. 내 사회성은 3년간 퇴화하여 5명의 사람도 불편해할 정도에 이르렀다. 학원 선생님이 내게 질문을 하거나 내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이 너무나 두려웠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 어떤 상황도 편안하지 않았다.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사람들과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일종의 대인기피 증세가 생긴 것 같았다.


  사람들 속에서 불안을 느끼는 증상은 더욱 심해져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발전했다.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하고 스트레스가 되어 지하철이 아닌 대중교통은 거의 이용하지 못했다. 영국 입시를 포기하고 난 이후의 이야기지만 수능 공부를 위해 단과 강의를 신청했을 때는 수십 명이 듣는 수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약한 공황장애가 생길 정도였다.


  수업 중에 그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차라리 수능을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능이 싫어 도망쳐온 곳인데, 이곳마저도 견딜 수 없어 다시 도망치려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다. 단체 수업을 도저히 못 견디고 개인 수업을 부탁하자, 학원의 선생님 중 한 분은 내게 '그런 증세를 치료받을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그런 취급에 화가 났지만, 아마 나를 가장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곳곳이 고장나고 부러진 모습에 나 자신이 놀랄 정도였다. 한 번 달라진 나를 인식하고 나자, 이전과는 달라진 썩어버린 곳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나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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