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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 냥이 Oct 15. 2015

앨범

그리워 할 수 없는...

10월 12일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펼 쳤다.

앨범 속의 나의 얼굴을 보니....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을 하신 조영순 선생님이 생각난다. 고맙고 감사한 나의 유일한 선생님. 진정한 나의 선생님.

그 뒤를 이어...생각 하기 싫은 기억 들도 함께 온다.


그녀의 머리속 초등 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온통 손찌검을 일삼는 깡패나  마음 고약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우리 땐 국민학교라 칭했다.

하지만 난 요즘 흐름에 따라 초등학교라 말하겠다.

사실 이렇게 선생님을 깡패라는 표현을 했지만,그 시대엔  그걸 아주 당연시 했다.


초등학교 1학년때 나의 짝궁은 나를 자꾸 괴롭힌다. 내 노트에 자기 아빠 도장을 찍어 대질 않나, 책상을 넘어 오지 못하게 금을 긋지 않나, 난 엄마에게 그 친구가 나에게 한 일들을 말했다.

며칠 뒤 선생심이 짝궁을 부른다.그리고 나의 노트도 갖고 나오라고 한다. 그애는 그날 머리통을 내 노트로 사정 없이 맞고  한쪽 뺨을 크게 선생님의 손바닥으로 맞았다.


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애가 한쪽 손으로 빨갛게 달아 오른 뺨을 가리며 나를 쳐다 보던 얼굴, 그날 선생님이 그애를 때리던 모습도, 나의 벌렁 거리던 가슴도.......

그 이후  어린 나였지만   엄마에게 말을 가려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거부> 라는 단어는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때 만 해도 극장집 딸로 위력을 갖고 있어나 보다. 선생들이란 힘 앞에 굽히는 비열한 사람들 ......내가 본 선생님은 그랬다.


2학년이 되었지만 난 여전히 자주 아팠다.어느 날 등교길에 몸이 좋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길에 담임 선생님도 보았지만  아파서 다시 집으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은 상태로 결석을 하게 되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선생님께 가느다란 회초리로 머리와 어깨를 수 없이 맞았던 기억이...결석 했다고.


아마 전 날 등교길에서 나를 보았는데 학교에 오지 않은 나를 농땡이 친 것으로 간주 한것 같다.

엄마가 연락 해 주었어야 했지만 그때 우리집 사정이 그럴 겨룰이 없었다. 나도 그냥 엄마 없는 집에서 아팠으니까.

2학년 때의 담임으로 인해 선생님을< 불신> 콱 .


그리구 3학년 때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친구들을 웃겨서 수업 방해 한다고 ...반 친구들을  웃겼던  내 짝을 나오라고 해서 양쪽 볼을 사정없이 후려 친다.

그때...내가 맞지 않았음을 얼마나 감사 하게 생각 했는지(나로 인해서  내 짝궁이 웃겼던 일이 었다)  .... 친구의 불행을 나는 그저 나에게 까지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랬다. <살아남기>의 나의 비겁함과 선생님의 <폭력>.


4학년 때는 어느날 엄마가 막내 동생을 외숙모에게 데려다 주고 학교 가라고 하신다. 우는 동생을 두고 나오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외숙모가 내 동생을 어떻게 대하는 지 알고 싶어서 가던길을 돌아 외숙모댁으로 다시 갔다.

밖에서 살짝 엿들으니...막내 동생을 달래는게 아니라 소리 지르며 혼낸다.어린 나였지만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다시 데리고 나왔다. 막내는겨우  1살 이었다. 우리 나라 나이론 2살. 학교를 함께 데려 가려 했지만 뚱뚱한 노처녀 선생의 못된 성격을 아는 지라 결석 하기로 마음 먹고 집으로 향하는데 이장댁의 딸 미숙이가 학교 가는 길에 나를 보았다. 나와는 또래 였지만 특별히 잘 어울리지를 않았다.

일 다녀 온 엄마 한테는 막내를 맡기지 말자고 설득하고 엄마와 내가 번갈아 보기로 했다.


며칠후 담임 노 처녀 선생님이 내게 동생  땜에 학교 나오지 않은 날 누구랑 있었냐고 묻는다. 동생이랑 집에 있었다고...했지만 믿지 않았다.이장 딸 미숙이를 데리고 놀러 갔다는 것이다. 사실 이장 딸 미숙이는 장애가  있었다. 그때 당시엔 어리고 철이 없어서 ..... 그애 하고는 놀지 않았다( 그때의  어린 맘 으로). 선생님은 잘못 했다고 하면 용서 해 준다고 했지만...난 잘못 한게 없었기에 절대 용서를 빌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쏘아 보았다. 그 벌로 난 수업시간 내내 친구들 보는 앞에서.....앞으로 나란히와  책상다리를 하는 벌을 서 야만 했다.

너무 분해서 울지도 않았고 ...자세도 흐트러 뜨리지 않았다.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그날의 벌은 어떠한 고문 보다도 육체적으로 힘든 것이다. 50분 동안 그 자세를 한다고 생각 해보라.

오히려 선생님은 나 같은 애 처음 이라고 독하다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울지도 않고 벌을 끝까지 다 받는다고.)사실 얼마나 울고 싶고 아팠는지 아무도 모른다. 온 몸에 살 점 들이 부들부들  다 떨렸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마음 속으로 '뚱뚱한 년' 이라고  외치며 참았다.

그날 그 뚱뚱한 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큰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자존심> 이 나를 지킨다.



엄마에겐 절대 말 할 수없었다.

왜냐면.......

아빠가 진 빚으로 1학년 때 부터 우리집 사정이 좋지 않았다.사실 7살 때부터 삐그덕 거리긴 했다. 무책임한 아버님은 나 몰라라 하고 어디론가 사라지시고...엄마와 우리 형제들은 빚쟁이와 순경아저씨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옛말에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다. 그건 우리집에 통하지 않는 말이 었다.

극장을 하다가.... ..생명보험으로 사업을 갈아 타면서 뭘 잘못 하셨는지...내 기억으론 보험이 맞다.


순경이 우리집에 와서 아버지 어디 계신냐고 물을 때 마다 어린 나는 너무 무섭고 떨렸다.

빚쟁이들은 우리가 어디다 돈이라도 빼 돌린줄 알고....엄마에게 손가락 질을 하면서 성질들을 부린다.

엄마는 빚을 갚고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셨다.

언제 부터 였는지 아빠와 연결이 되었지만, 남모르게 007 작전으로 엄마는 아빠를 만나러 다니고......그러면서 막내가 ...내가 3학년때 태어 났다. 어린 나이 였지만 엄마가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정말이다.


이런 나의 엄마에게 어떻게 학교에서의 일을 말 할 수 있겠는가.아마도  나의 사춘기는 초등학교 때  였을 것 같다.

우린 6남매 였지만  위로 언니들은 중, 고등 생이라...내가 스스로 양보했다. 아래로 두 동생을 돌보는 것을......언니들도 내 어릴 때를 다 돌 봐 주었었기에.....오빠는 나보다 2살 많았지만 철이 없었다.

언니들과 나 의 차이는 <스스로> 와 <시켜서> 의 사소한 차이 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4학년을 힘겹게 마치고 5학년이 되었다.

엄마가 막내 동생이 커서  업고 다니기에 버거 우신것 같다.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아프시다.어린 동생도 있고 ...결석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묻는다.

 "영주야 어디 아팠니 ?"

  "아니요. 엄마가 아픈데...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요."

" 아~그랬구나. 영주야 이젠 동생 데리고 함께 학교에 나와도 돼"

조영순 선생님,

얼굴도 예쁘셨지만 마음도 아름다운 나의 선생님.

선생님은  결혼도 하지 않은 아가씨였지만, 내 동생 똥기저귀도 갈아 주신다.

선생님 덕분에 동생을 학교에 데려 갈 수 있어서 엄마와 난 조금 수월했다.

<사랑>에 대해 알게 해준 나의 유일한 선생님.

세상에서 가장 멋진 분으로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자리 하고 있다.


6학년이 되었을 땐 동생 나이가 4살이고  학교와 집이 가까워서 점심 시간에 맞춰서 다녀 오곤 했는데...동생이 가끔 학교에 찾아와 교실 밖에서 기다린다. 그것두 못 마땅하신지 담임선생님이 애를 못 오게 하라고 하신다.

그 말을 듣고 너무 눈 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난  울지 않았다.  어렸어도 난 나쁜 사람들 앞에서는 안 울었다. 그게 나를 지키는 자존심이 었다.

동생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학교에는 오지 말라고 누나가 점심 때 꼭 간다고...그 앤 워낙에 영특한 아이라 이해 했다.

그리고 웬만 하면 엄마가 좀더 고생하시기로 했다.

허 참

초등하교 시절의 내 기억의 저 편으로 잊혀지지 않는 한 조각들이란 추억 들이 내가 상처받은 얼룩의 기억들 이라니...

조영순선생님의  기억이 내게 없었다면 나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들은 암흑기 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의 빛이 되어준 선생님이 있기에 내가 이렇게 이 자리에서 글이 라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리라.


기억이란 것이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그 장면들이 영상처럼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있는지........

아마 너무 충격을 받았거나 감동받은 기억 들이라 그럴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이젠 무색하지만......잊혀지지 않는 아픈 기억은 요즘 시대의 흐름처럼 팍팍 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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