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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루티스트 정혜연 Mar 25. 2023

파리지엔느와 히키코모리 그 사이 어딘가 Ep.11

11. 살기 위해 시작한 비건일기 (2)


나의 비건은 어떤 신념이나 철학 따윈 없다.

그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그렇게 나는 마트로 향했다.


프랑스 마트에는 비건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다양한 식재료와, 과자와 간식류, 육식을 대체할 대체품까지. 확실히 이런 쪽으로 앞서 나가는 프랑스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이 베지테리언 구역 앞에 서서 한참을 둘러본다. 앞에 놓인 식자재들로 무엇을 해 먹을까 상상한다. 내가 모르던 세상을 마주하니 굉장히 신난다.

이미 내 마음은 비건 셰프다.


처음엔 가볍게 갖가지 채소들과 나름 조금 비싼 올리브유를 샀다.


나름 고심해선 산 올리브유, 얼마전 신세계 백화점에서 마주했다.

몸에 파릇파릇한 것들을 넣기 위해 생채소와 올리브유를 함께 먹었다. 생각보다 생파프리카는 나와 맞지 않았다. 하루종일 소화가 안되고 파프리카 향이 떠나질 않았다.


다음으론 고심하다가 평소에도 좋아하던 아보카도를 이용해 바게트 핑거푸드를 만들어봤다.

적당히 자른 바게트 위에 으깬 아보카도를 올리고 올리브유로 구운 버섯을 올린다. 그 위에 마무리로 호두를 올려준다. 결과는, 이보다 맛있는 조합을 먹어본 적이 없다. 물론 바게트의 나라이니 바게트 자체만으로도 너무 맛있는데, 나머지 조합들은 정말 환상의 궁합이었다.


이후 비건 요리들을 하다 보니 아보카도와 버섯이 없었다면 비건을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점점 나의 비건 레시피는 레퍼토리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내 식단은 크게 한식, 파스타, 샌드위치 정도로 나뉘었다. 하루 두 끼, 아점을 먹고 저녁을 먹는다. 이렇다 보니 비건을 시작하고도 재료만 채소들로 바뀌었을 뿐 나의 메뉴들은 비슷했다.


호밀빵 위에 아보카도와 루꼴라를 올려 라임즙을 뿌린 심플하지만 완벽한 오픈 샌드위치와 비건빵 위에 집에 남은 짜투리 채소를 볶아 올린 건강한 야식.


샌드위치를 자주 먹다 보니, 바게트, 호밀빵에 이어 비건 빵을 찾기 시작했다. 비건빵은 왜인지 약간 시큼하고 쿰쿰한 맛이 난다. 그리고 식감은 좀 무겁다.

처음엔 상한 건가 싶었는데,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시금치, 당근으로 만든 푸실리로 만든 비건 파스타. 파스타 소스 역시 비건 제품이다.
바질 파스타와 버섯 알리오올리오

주식 중 하나인 파스타 요리들이다.

양식 요리를 할수록 생각보다 비건 제품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의 모든 파스타 소스들이 비건으로 출시되어 있고, 맛 또한 훌륭하다.

더 나아가 이렇게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되니 이왕이면 밀가루도 멀리 할까 싶었는데, 파스타 면도 글루텐 프리에 통밀, 호밀, 채소들로 만든 면까지 굉장히 폭이 넓어서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정말 편안했다.


버섯불고기덮밥과 볶음밥


한식도 빠질 수 없지!

프랑스가 채식 재료들이 잘 나와있어서 한국보단 유럽에서 비건을 하기 더 편하겠다, 생각이 들던 중, 한식들을 계속 도전하다 보니 이보다 더 다양한 비건요리들이 있나 싶더라.


우리가 흔히 먹는 요리에서 고기만 빼면 그만이다.

불고기 덮밥에는 고기 대신 버섯을 왕창 넣는다. 볶음밥에는 갖가지 채소들과 두부를 넣는다. 간은 소금과 후추면 그만.


버섯콩나물밥과 두부부침, 그리고 비건 카레


우리에겐 콩으로 만든 많은 식재료들이 있다.

가장 간편한 두부 부침과 콩나물 덮밥에 김을 싸 먹는다. 여기까지 오면 내가 비건을 하고 있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카레가루에도 고기가 들어가는 것을 아는가? 그래서 나는 비건 카레가루를 사용하여 카레를 자주 해 먹었다.


비건을 시작하고서부터 장을 볼 때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고작 한 사람의 한 끼를 위해 한 시간이라니. 그 이유는 항상 모든 재료의 성분표를 보고 따져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게 이 과정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매일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가서 무얼 해먹을지 고민하며 성분을 검색하는 시간이 그렇게 즐거웠다.




버섯탕수육과 채식짬뽕


이젠 하다 하다 중식을 해 먹는 지경에 온다.

이 버섯 탕수육은 내가 먹은 어떤 탕수육 중에도 단연 최고의 맛이었다.


친구들을 초대할때는 월남쌈을 먹는다.


채소들로만 꾸려진 월남쌈.

예쁘게 한 상을 차려서 친구들과 함께 먹는다. 채소들은 무한 리필! 아무리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은 매직.




채식 식사를 하다 보니 가장 좋은 것은 속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식탐은 강하지만 그에 비해 너무 연약한 위를 가지고 있어서 많이 먹지를 못한다. 그런데 채식은 먹고 나면 그저 고요하다.

단점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니 그런 허기짐이 사라지고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 포만감이 들기 시작했다.




자, 그래서 철저한 비건 생활을 한 내 몸은 어떤 변화가 왔을까. 설마 비건으로 내 병이 다 나았냐고?

그건 아니다. 그러나 우선 피곤함이 사라졌다.

나는 밤에는 뒤척이며 잠에 쉽게 못 들고, 그로 인해 늦게 일어나며 온몸이 뻐근하고 하루 종일 졸린 루틴을 가진 말 그대로 최악의 수면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건을 하고 나서부터 머리를 대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그냥 눈이 떠졌다.

가장 신기하고 성과 있는 경험이었다. 알람보다 일찍 눈이 떠지고 일어나서는 몸이 가벼웠다.

세상에, 인간이 이런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가 있다고? 놀라웠다.


두 번째로는 확실히 두통과 가려움증이 사라졌다.

두통은 잠을 잘 자서 그렇다고 치고, 가려움증이 덜해진 것도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벼랑 끝에서 이런 경험을 한 나는 여기저기 비건의 장점을 전파하고 다녔다.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도 이 장점들을 알려주니, 건나물들을 사서 좀 보내주겠다고 했다.


엄마가 보내준 건나물들


한국에서 물 건너온 엄마의 사랑이다.



엄마가 보내준 귀한 재료들로 음식을 한다.

표고버섯을 넣고 끓인 진한 된장찌개와 취나물 무침.


이렇게 엄마의 사랑을 받고, 내가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해서인지, 3개월 뒤 건강이 눈에 띄게 몸이 좋아졌다. 물론 그쯔음 알러지 판정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한 이유도 있겠지만.


뭐가 됐든 병이 낫고 안 낫고를 떠나서, 나는 나를 위한 노력을 했고, 그 과정이 즐거웠고, 결과 또한 따라주었다.


비록 지금은 다시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너무나 평범한 삼십 대가 되어버렸지만, 그때의 경험은 먹는 것 그 이상으로, 내가 나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고, 그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의지와 노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렇기에 비건을 하지 않는 지금도, 나는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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