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하기

by 구름 위 기록자

계절이 바뀌고 있다.
이제 곧 내가 날아가는 세계 곳곳에도 가을을 지나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두바이의 여름도 천천히 다음 챕터로 넘어가며,
뜨거운 공기 사이로 비로소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제, 코트를 꺼낼 시간이구나.”


오랜만에 연 장롱 속 공기는 한여름의 열기만큼이나 답답했다.
엄마가 예전 내 방을 보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여긴 도깨비 세 마리는 살겠다.”
그 말이 이토록 정확할 줄이야.
아니, 솔직히 도깨비도 이 장롱엔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았다.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늘 이상한 핑계가 붙었다.
“내일은 비행이 있으니까.”
“장롱 정리는 아침에 해야 복이 안 달아나.”
별의별 미신까지 만들어내며 나는 미뤘다.


그러던 어느 날, 브런치에서 @미니멀랑이 작가님의 글을 읽었다.
미니멀 라이프의 시작은 버리기였다'
그 문장에서 결심이 섰다.

그래, 완벽한 정리는 아니어도
우선 버리기부터 해 보자.
마침 오늘은 날씨도 좋고, 마음도 가벼웠다.
이건 신호다. ‘정리데이’를 선포했다.


장롱 문을 여는 순간, 그 안은 마치 ‘추억의 박물관’ 같았다.
1년 동안 한 번도 손대지 않은 물건들이 나를 반겼다.
‘언젠가 입겠지.’
‘언젠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정리하면서 알았다.
그 ‘언젠가’는 1년 안에 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선물 받았지만 내 취향이 아니었던 옷과 액세서리도 있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들.
그때 ‘비움의 기술’에 나온 문장이 떠올랐다.

“고마움을 전하며 버려라.”


그래,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물건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고마움을 전하고, 그 물건들을 기증 상자에 넣었다.
그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정리를 하며 의외의 발견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이미 오래된 것들이었다.
자주 입어서 색이 바래고, 손이 자연스레 닿는 자리의 옷들.
그 안엔 ‘내 시간’이 배어 있었다.
반면 새것처럼 반짝이던 옷들은
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장롱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기약 없는 나중’을 붙인 물건들을 비워내기로 했다.

그건 단순히 공간의 정리가 아니라,
‘부족하다고 느끼던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이 대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만큼의 물건들을 들였던 것일까..


물론 아직 보류 중인 것들도 있다.
비우기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물건들.
하지만 괜찮다.
시간이 흘러 또 한 번 계절이 바뀌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손이 갈 것이다.


이제는 ‘더 채우기’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태생부터 미니멀리스트는 아니다.
아니,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진짜 맥시멀리스트다.
감정도, 기억도, 물건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번 정리를 통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비운다’는 건 완벽한 절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잘 알아보는 연습이라는 걸.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연습이라는 걸.


나다운 균형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정리의 끝을 알리는 듯, 띵동!
기증 상자를 다 닫자마자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00 브랜드 50% 세일! 마지막 찬스!”


나는 웃으며 그 메일을 지웠다.

장롱뿐 아니라,
메일함까지 비워냈다.



*오늘의 ‘정리데이’를 열 수 있었던 건,

@미니멀랑이 작가님 덕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https://brunch.co.kr/@minimalrange/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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