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시간부자의 일기
워터히터 탱크가 고장났다. 저번주 목요일. 하우스메이트 루씨가 부동산 담당자 데이빗에게 문자를 보내겠다고 한다. 나도 문자는 보낼 수 있는데, 너가 전화를 해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은 하지만 우선은 고맙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둘 다 전화에 약한 문자파들이다. 전화에 약하다는 말을 들으면 세상은 두 부류로 나뉘겠지. "그게 도대체 뭔말이냐.. 전화는 그냥 하는거지." 라는 거침 없는 전화파들과, "저놈 나와 같은 놈이구료.." 하는 예민한 문자파들. 전화에 약하다는게 뭔지 아는 사람은, 전화를 하는데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것 외에도 이어지는 다른 동족적 속성들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도대체가 왜 때문에인지 그저 영영 저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겠지. 하지만 고하자면 세상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꽤나 많다. 지구 반대편에 와서도 영국발음을 쓰는 Jersey 출신의 하우스메이트까지도 나와 비슷한 종족인 것이다. 그러니까 같이 살고 있는 것이겠지만서도;
어쨌든, 데이빗은 한참 후 연락을 주었다. 오늘 내로 누군가가 해결하러 갈 것이라 아주 짧게 대답했단다. 문자파 우리는 답변을 받은 상황에 우선 만족한다. 난 가뜩이나 전화가 힘든 사람인데, 영어로 하는 전화는 잘 들리지도 않을 뿐 더러, 3-4번을 반복해서 다시 말해달라 해도 못알아 듣겠을 땐 그냥 대충 알아들은 척을 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아 생각만 해도 이메일이 백배 천배 편하다. 그래서 나는 메일로, 루씨는 주로 문자로 데이빗과 소통을 한다.
데이빗은 내 보기에 아마도 20대 후반 쯤 되는 젊은 부동산 담당자로, 우리가 사는 아파트 동네 여덟 가구의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다. 기적과도 같이 이 집 렌트가 성사되어 계약할 때 처음 만난 그의 첫 인상은 아주 활기차고 융통성 있어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무언가를 요청할 때마다 그는 정말 최소한의 정보로 응대한다.
지난 번 화재경보기 조작박스에서 에러음이 엄청 시끄럽게 나서 일주일을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데이빗에게 메일과 문자로 연락을 했었는데, 처리하겠다고만 대답하고 그 다음의 스케쥴을 주지 않았다. 30초 마다 나던 에러음은 간격을 좁히며 점점 심해졌다. 기다리다 못해 상황을 설명하며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려줄 수 있느냐 몇 번을 공손히 물었는데 그때마다 매우 불친절하게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다음 스케쥴을 알려주지 않았다. 여러 업체에서 왔다 갔는데도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았던 것 같긴 하나, 그래도 10초 마다 울리는 에러음에 히스테리의 강도가 더해져 열불이 났지만 차마 뭐라 할 용기가 안났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1월에 재계약을 해야되고, 집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던지라 비위를 거슬리고 싶지 않았다.
여하간 목요일 당일에 고장난 히터를 보러 사람이 왔고, 보더니 이거 이거 큰 공사가 되겠다고 한다. 워터탱크에 달린 조작 센서같은 것이 고장났는데 파이프를 분리하고 탱크를 분해하고 어쩌고.. 난리가 나납다. 자기 보스에게 물어보고, 자기 보스가 데이빗한테 물어본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그 다단한 소통절차부터 불길한 예감이 흐른다. 알겠다고 보내는 마음에서 이미 나는 다음주를 예상하고 있다. 주말은 당연하고 월요일까지 아무 연락이 안왔다.
재계약이 다가오는 시점에 서서 더더욱 왠지 모르게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는게 나이를 헛먹은 것 같고 기분이 영 드릅다. 그냥 조용히 기다릴까 싶다가도 당연한 권리를 지극히 당연한 수준으로 요구하는 것인데 한마디를 못하는게 너무 짜증이 나서 루씨에게 메일을 쓰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문자를 보내겠단다. 데이빗한테 바로 답이 왔다. 부품을 주문했고, 도착하면 연락이 갈꺼라고. 아니 그럼 진작좀 말해주던가..... 무려 뜨건물 히터가 고장났는데 말이지. 반대로 무려 뜨거운 물이 안나오는데(부스터를 켜면 나오긴 나온다. 전기세도 같이 나오겠지만.) 가만히 기다리는 우리가 바본가 싶기도 하다.
권력과 권리 사이에서 여전히 똥매려운 강아지 같은 내 모습에 어른이 될람 아직 멀었나 싶기도 하고, 한때 회사에서 뭔 똥불굴의 의지로 내 의견을 끝까지 관철시켜내던 모습도 잠깐 떠오르며 도대체 진짜 나의 모습은 무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난 그 모습을 잊은건가, 아니면 그때 내 모습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게 아팠던 건가. 권력 앞에서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중한가, 더럽고 치사해도 뼈시린 1월 갈 곳없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는 것이 중한가.
개들은 누군가와 마주치는 0.01초의 순간, 저 생명체가 나보다 약자인지 강자인지를 파악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부터 기싸움이 시작되고, 더 싸울 필요도 없이 승패는 이미 갈릴 때가 많다고. 그 이후로 여행다니며 목줄이 없는 개를 만날 때마다 나는 엄청 큰소리로 개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지만 안녕!!!!!! 이라고 외치는 와중에도 목 뒤를 흐르는 두려움은 어쩌지를 못했다. 그리고 개들은 귀신같다. 그것을 모를리가 없다.
사실 인간도 그러하다. 언어의 세계에서 표현하고 살지는 않지만, 우리는 첫인상에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심지어 그 사람이 걸어오는 모습에서도, 표현할 수는 없는 묘한 기류들을 아주 분명하게 감지 해낸다. 저 사람이 나보다 약자인지 강자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억지 미소 쯤이야 기본기가 된 이 사회에서, 표정도 몸집도 약자를 판단해내는 기준이 되진 못한다. 그 기준은 아마도 동물계에서 통용되는 기준과 같을 것이다. 두려움. 약자들은 대체로 무언가를 두려워 하고 있다. 뭔가를 틀릴까봐, 저 사람보다 못할까봐, 개한테 물릴까봐. 스스로에 대한 믿음보다 두려움이 강할 때.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잃고 두려움에 압도된 모습은 아주 좋은 먹이감이 되기 마련이다. 강자들은 귀신 같이 그것을 감지한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어쩔 땐 그 두려움이 상대방을 강자로 만들기도 한다, 그들은 굳이 그럴 의지가 없었음에도. 그것 또한 동물적인 본능일지도.
데이빗도 나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자에서도 이메일에서도 나의 공손하고 또 공손한 말투는 약자롭기 그지없다. 권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강자 앞에서는 닥치고 기어라 일 때가 많다. 그렇게 두려움은 학습당했고, 나의 두려움은 강자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인가, 4시면 깜깜해지는 1월의 추위가 두렵긴 하다. 다시 그놈의 집 구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오금이 저리게 끔찍하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괜찮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애써 집어 가슴 한복판에 놓아 놔본다. 관철시키는 자로 회사를 다니며 아팠던 이유는 두려움을 이기려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하고 싶지 않고, 지고 싶지 않은 불타오르는 경쟁심의 힘을 더해서. 두려움을 억지로 이기지 않으면서 두렵지 않는 방법이 과연 있는 것일까.
하나 있긴 한 것 같은데 굉장히 어이없고 바보스럽다. 눈 감으면 코베어가는 세상임에도, 그냥 믿어보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새 역사를 자꾸만 써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날 자꾸만 약자로 만드는 세상에게, 전 사수가 늘 하던 말처럼, 빵꾸는 메우면 된다, 진짜로 수습 못할 사고는 사실 별로 없다, 세상 일 별거 없다, 괜찮다. 라며 두려움 대신 믿음을 택하는 수 밖에는. 그렇게 살아보다 보면, 믿음이 두려움보다 조금씩 강해지기를 바라보는 수밖엔. 그렇게 목소리를 억억 삼키며 살지 않아도, 그들은 생각보다 날 내쫓기 어려울 것이고, 설사 내쫓아진단들, 또 기적처럼 살 곳은 어이없게 나타날 것이다. 설령 그지 같은 곳이 나타나더라도, 또 살다보면 좋은 곳이 찾아지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세상 일 별거 없다. 괜찮을 것이다. 자꾸만 밀려나는 믿음을, 어르고 달래 자꾸만 한복판에 놓아놔본다. 두렵지 않은 이에게 강자가 펀치를 날릴 구석은 별로 없기 때문에. 믿음의 힘은 생각보다 압도적이므로. 그렇게 믿어보는 수 밖엔 없다. 권력과 권리 사이에 자꾸만 믿음을 놓아두는 연습을 한다. 이왕지사 전화 한통 하는 것 어려운 약자의 팔짜로 태어났다면 아주 아주 강력한 약자 정도는 꿈꿔볼 수 있지 않나.
2018.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