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소담 Nov 15. 2018

딴짓의 의례   

조금 더 살만한 하루를 위해, 오늘도 의례를 벌인다. 딴 짓의 의례다.

2018.09.23


드디어 이번주 부터 학교가 시작되었다. 모든 학기의 초반부는 리쳐드(학교의 디렉터)의 컨디션이 유독 좋으므로, 수업의 공기가 아주 찰지다. 이번 주도 태풍 때문에 학교를 못간 수요일을 제외하면, 학교가 끝나고 마음이 따뜻하고 좋은 것들로 그득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시작하게 되면서 미드를 보거나 멍때리는 딴 짓의 시간이 줄어든다. 그 와중에 글쓰기 혹은 다른 생산적인 일을 잘 해낼 시간을 끼워내는 것이 이번 학기의 숙제다. 얼마 전 하나투어 여행웹진 객원 에디터를 지원했는데, 당첨(?)이 되었다. 곧 한 달에 한 번씩은 마감이라는 것이 생긴다. 마감형 인간은 데드라인에게 멱살을 잡혀야만 피가 끓는가. 회사 다닐 땐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왠지 설레기도 한다. 다르게 일하는 법을 다시 배워내고 싶은 도전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데드라인에게 멱살은 잡힐지언정, 억지로 살며 몸과 맘을 망가뜨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들로 즐거이 시간을 잘 채워내는 습을 익히고 싶다. 고것이 아일랜드 생활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



-



우리 뇌는 '끝나지 않은 것' 을 인식한단다. 그래서 머리나 마음 속에서 끝을 맺지 못한 일을 작업보드에 끊임없이 올려 놓는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도, 실패한 일들이 더 잘 기억나는 것도 그 이유다. 이는 자이가르닉 효과 라고도 불리운다. 그리하여 하기로 한 무언가를 안하고 있으면 뇌는 자꾸만 우리에게 신호를 준다. 계속 해야하는 것이 남아있으니 의식의 저편 어딘가에서는 그것에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이냐고 자꾸 신호를 주는 것이다. 우리 뇌는 쓸데 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 뇌가 그 시선을 거두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던 간의 'closure'가 필요하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딴 짓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딴 짓 한 번을 맘 편하게 할 수 없어서 온다. 딴 짓이란 놈은 징헌 놈이어서, 반드시 하고 넘어가 주지 않으면 우리 다리를 놔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맘 불편한 딴 짓을 하면 뭘 하든 불안하고, 해야만 하는 것을 안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이도 저도 제대로 못한다. 마음이 온통 쓸데 없는 감정들로 소진 되느라 어느 시점 부터는 나의 욕구들을 감각하는 것에도 둔해지고 딴 짓 할 기운 조차도 사라진다. 이것은 꽤나 큰 문제로 발전한다. 우리는 작고 큰 딴 짓들로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기 때문이다.


딴 짓을 맘 편하게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유독 사회에서 정해진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세상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학교나 부모의 지시를 듣지 않아도 되는 무려 어른이 된 우리는 원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스스로 다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자꾸 까먹는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딴 짓을 할 자유가 있음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것.



딴 짓은 주로 호기심으로 출발하여 그저 재미를 좇는 일이다. 쉼을 가지며 심심함의 틈을 개발하는 일, 그 틈들 사이로 쓸데 없는 영감이 폭발하는 일. 생각해 볼 수록 엄청난 일 아닌가. 우리의 삶에 비로서 호기심과 재미와 영감과 쉼을 주는 일이 나쁜 일일 수는 없다. 성적표나 회사 책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가장 생 것의 내가 드러나는 일. 내 생김의 윤곽과 질감과 한계들을 알려주는 일. 나는 뭐가 신나고, 뭐가 재미난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다.



바다 산책, 조개 줍기, 털실 가지고 놀기, 돌 모으기, 언어 탐구, 기타와 노래, 책 구경, 오감 연구 등등.. 다양한 딴 짓들로 나를 연구한다. 딴 짓도 얼마나 하면 질리는지, 피곤할 때, 짜증날 때, 하기 싫을 때, 어떤 딴 짓이 땡기는지, 기분이 좋아지는 일들은 무엇인지 좀 더 섬세하게 배워간다. 그렇게 운좋게 확정된 몇 가지가 있다면, 딴 짓에서 승격하여 일상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도 좋다. 딴 짓의 의례라 불러 본다. 내가 결정하지 않았지만 고장난 배경음악처럼 인생을 따라다니는 안좋은 감정, 생각, 습관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얼마 안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조금 더 살만한 하루를 위해, 오늘도 의례를 벌인다. 딴 짓의 의례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경건하고 엄숙한 일이다. 의례를 마치면 내가 마감의 멱살을 잡을 힘이 생길지도 모른다. 삶은 모를 일이다. 좀 더 열심히 딴 짓을 해볼 수 밖엔.

매거진의 이전글 강력한 약자가 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