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러들어 빠르게 사라지던 시간을 1초 1초 펼쳐서 지나가 본다.
남자친구 곰주부를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소개할땐 늘, He likes to cook & share 라 소개한다. 내가 보기에 그는 요리보다는, 요리해서 먹이며 함께 나누는 것을 사랑하는 것 같기 때문. 여행 동안 음식을 만드는 일은 매일매일 내 몸을 채워내는 수련과도 같은 일이기도 하고 이를 새로운 이들과 나누며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우리에게 다채로운 정신적 영양분을 충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오늘의 Dining Therapy.
#Dining
배생강차, 감자채볶음, 오이무침, 떡꼬치, 불고기, 트러플계란찜,
김치베이컨치즈볶음밥, 된장찌개 (뭐이리많지)
#Therapy
아르헨티나 출신, 구연인이었던 그들, Esteban & Yanina. 원래 오늘은 우리와 함께 집에 머무는 에스테반과
서먹함을 풀기위해; 마련한 자리였으나, 아르헨티나로 돌아가는 날이 얼마남지 않은 에스테반의 구 여친 야니나가 작별인사겸 집으로 놀러온 바람에 급 함께하게 되었다.
프로그래머인 에스타반과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야니나. 둘 다 여행으로 코펜하겐에 왔다가, 에스타반은 직장을 구해 머물고 야니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한다. 영어가 미숙한 곰주부는 대화에서 늘 조금은 뒤로 물러나있게 되는데, 야니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를 대화로 끌어들였다. 다니다보면 이 경험은 아주 드물고 소중한 것이다. 사실 대화에 필요한것은 관심과 마음인데, 언어적이고 빠른 대화의 흐름에서, 비언어인 마음과 관심을 던져주며 모두가 참여하는 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자연스레 보여주었다. 사람에 대한 맑은 태도와 장난스럽지만 중심있게 유쾌한 야니나는 참으로 러블리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깔깔 웃으며 시끄러운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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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웨덴 말뫼에 간다고 하니, 열쇠를 조심해라! 라고 하기에, 너네 열쇠잃어버렸었구나 하니.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하필 집에 머물다 독일로 떠난 독일인커플이 열쇠를 가지고 가버려서 주인아줌마도 열쇠가 없었다며.. 늦은밤이여서 여차저차 친구집에 가서 자야했던, 그리고 엄청 비싼돈 주고 문 열쇠구멍을 갈아버려야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에스타반이 야니나에게, 사실 어느 날 발견한건데, 열쇠는 가방 작은 주머니에 끼인채로 숨어 있었어. 그래서 지금은 열쇠가 무려 4개야 라고 고백했다...ㅋㅋㅋ 한동안 떨어져 지내서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야니나는 한참동안 머리를 부여잡으며 충격에 휩싸여있었고 열쇠구멍 엄청 비쌌었는데!!! 부터 그 저녁에 그 고생을 했는데!!! 부터 숨어있던 열쇠가 악마 아니냐!!!며 다시 버려버려야한다며 소리를 치며 한참을 깔깔댔다.
그리고는 재밌는 이야기를 위해선 bad luck 이 필요해. bad luck 이 없으면, 세상엔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을꺼야. 라고 하는 야니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나쁜 운은, 내 인생에 누군가들과 깔깔거릴 즐거운 추억거리가 될것이라- 는 마음이라면
서로의 실수에게도 오늘의 나쁜 운에게도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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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름 다양하게 준비한 음식에 엄청나게 놀란 그들은 이걸 만드는데 몇시간이 걸렸어? 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릇을 싹싹 비우며 아주 맛있게 잘 먹어주었다. 덴마크에서 한국음식점을 차리라고 외치던 에스타반. 그리하여 곰주부 뿌듯뿌듯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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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로마에서의 한달이 시작됐다. 에어비앤비에서 찾은 로마의 집은 현지인의 집이라기보다, 숙박업소 같았다. 그렇지만 방은 넓직하고, 깨끗하고, 빛이 잘 든다.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 좋은 것도 있다. 빛이 잘드는 넓은 방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 주요 일과는 집에서 밥차려 먹다가 장을 봐오거나, 4-5시쯤 느적느적 나가 베네치아 광장에서 해지는 것을 보는 일. 혹은 지올리띠 젤라또집에 수박맛, 복숭아맛, 파인애플맛 젤라또를 사들고 맛있다를 연발하며 판테온 광장을 걸어다니거나, 스페인 광장의 사람들 무리에 뒤섞여 앉아 맥주를 마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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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비가 와서 선선해진 날씨에 발코니에 앉았다. 가진건 시간뿐이니, 평소에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해보게 된다. 탄산수를 마실 때 괜히 레몬을 썰고, 와인잔을 꺼내보는 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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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유도 모르고 정신 없이 하루하루를 살며 바쁜 동안에는 동작 하나하나에 쉼이 없었는데, 이제는 동작 하나하나에 의식과 숨이 들어간다. 내가 그동안 어떤 동작들을 생략해왔는지 알게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싫어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생략되었던 동작들을 넓혀본다.
비가 오면 나가기 싫었던 대신 창문을 열고 비냄새에 선선해진 공기를 가만히 쐬어보고, 목이 마르면 아무컵에나 물을 마시던 것 대신 좋아하는 컵을 고르고 굳이 레몬을 썰어본다.
움츠려든채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빠르게 사라지던 시간들을 1초 1초 펼쳐서 내손으로 내발로 지나가본다. 마치 구겨졌던 몸이 조금씩 펴지듯이 시간이 펼쳐지는 느낌은 참으로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