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지독한 우울감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책은 한글자도 읽지 못하고,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도 전혀 없었다.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지만 몸을 이끌어 일정에 나서는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나는 지쳤고, 내 인생은 흑백이었다.
밀린 업무를 보러 잠시 카페에 나선 어느날 오전.
평소와 같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가벼운 수다를 시작했다.
엄마 친구의 아들 얘기, 동생이 아는 언니에 대한 얘기였다.
화가 났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원래 같으면 같이 떠들고 하하호호하면서 넘겼을 얘기가 짜증이 났다.
내 속도 모르고,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고 늘어놓는 그 얘기가 너무나도 힘겨웠다.
꾹꾹 참으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없다고, 그냥 바쁘다고 했다.
그날 오후,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은 나에게 자주 연락하지 않는 편인데, 이전에 아주 큰 일이 있을 때 전화를 받았던 그날 이후
나는 아직도 동생에게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한다.
심장이 조이면서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동생은 어딘가가 많이 아프다고 했고, 나는 병원에 갔다와서 연락 달라고 말하고 끊었다.
엄마의 수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서 나는 힘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 이유없이 또 눈물이 났고, 서러웠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는 말을 잘 안한다.
친구들에게는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고,
가족들에게는 부담이 되기 싫다.
아무도 부여하지 않은 우리집에서의 K-장녀의 역할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크게 자리 잡았나보다.
내 인생이 팍팍하고 힘들어도 본가에 갈 때면 텐션을 끌어 올려서 밝은 딸의 모습을 했다.
엄마 아빠 동생이 사회생활에서 겪은 일, 개인적으로 투덜거리고 싶을 때 터놓을 곳이 되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날은 아니었다.
참을 수 없이 힘들었다.
다음 날까지 동생은 병원 갔다오면 알려달라는 내 톡에 아무런 답장이 없었고,
엄마는 내가 별일 없을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완전히 감정이 폭발해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연락이 온 엄마가 동생의 상태를 물었을 때 괜찮다고 했고, 또 다시 내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수다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맑게 답장 못해서 미안하다는 동생이 미웠다.
밤새 걱정한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엄마가 미웠다.
말한 적도 없는 내 상황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던 것이 오만했던 걸까.
아니, 난 알아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냥 듣기 싫은 날도 있는건데.
참 미웠다.
K-장녀의 책임감이란 이런걸까.
답답하지만 아무도 부여하지 않았는데, 혼자 무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가족들의 기댈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는 것.
엄마에게 전화해서 그동안 쌓인 일들을 마구 늘어 놓으며 펑펑 울었다.
전과목에서 하나만 틀려도 틀린 하나 때문에 혼났던 나와
한 과목에서 와장창 틀려도 잘했다고 온가족이 박수쳐주던 동생에 대해 얘기했다.
엄마는 기대가 달라서 그런거라고 하더라.
그만큼 나를 더 많이 믿고, 기대감이 커서 그런거라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어렵다고 했다.
첫째는 더 큰 기대와 사랑으로 키웠는데, 책임감이 무겁다고 하고.
둘째는 첫째만큼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항상 있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 나도 힘들어.
나도 가끔 힘들 때가 있는거잖아.
엄마랑 수다떠는게 너무나도 즐겁지만, 가끔은 듣기 싫을 때도 있는거잖아.
엄마랑 아빠, 동생이 힘들 때 나한테 얘기하고 기대는게 고맙지만, 버거울 때도 있는거잖아."
한참을 하소연하고 끊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끊자마자 두서없이 뱉어낸 내 짜증과 하소연이 엄마를 죄책감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지 미안해졌다.
참, K-장녀로 살아가는건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과의 관계는 어려운 것 같다.
내가 머리가 커졌기 때문이겠지.
조금 더 가깝고도 친밀한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야겠다.
혼자 짊어졌던 너무 큰 책임감을 조금은 내려놓고 살아가보려 노력해야겠다.
장녀로서의 삶이 아니라 나 자신, 다른 사회적 역할로서의 나 자신에 집중해야겠다는 다짐이 드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