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으며 고민했다.
몇 년간 종종 예고없이 나를 찾아와 우울함의 동굴 속으로 데려가는 그것은 무엇일까.
오랜 고민의 답은 강박이었다.
사는게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 착한 딸이어야 한다는 강박.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책임감에 허덕이는 K-장녀로 만들었고,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불편함을 내뱉지 못하고 허허실실 웃고있는 가면을 쓰게 만들었고,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자책하게 만들었다.
나는 참 솔직한 사람이었는데, 솔직한 사람이 편하고 좋았는데.
그렇지 못한 내 자신이 싫고 미웠다.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그리고 그 시작인 강박은 나를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로 끌고 갔다.
터널에 들어가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처음에는 며칠, 그 다음엔 몇 달......
그동안 쌓인 내 마음이 터져버린 어느 날.
더 이상 우울이라는 감정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긍정적이었던 A는 오랜 기간 나의 우울함을 지켜보며 부정의 물이 들어버렸다. A는 참 대책 없이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하면 되지뭐~ 다 잘될거야" 이게 가장 많이 하던 말이었다. 나랑 가까운 친구들도 내가 A와 만나고 나서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할 정도였다. 매 순간 최악을 보는 나와 달리, 최상의 모습만을 보는 A는 나를 참 밝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A는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라고 했다. 그날의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룰루랄라 즐겁게 행복한 꽃길을 걸어가던 그 아이의 길을 흙탕물로 만들어버린 내가 미웠다. 너무 미안해서 펑펑 울었다.
더이상 내 우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나의 어두움에 물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피해 동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어차피 죽을 용기도 없다면, 이왕 살아있다면,
하루하루를 소소하고 잔잔한 평온함으로 채워가고 싶었다.
너무 행복하지도, 너무 우울하지도 않은 잔잔함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강박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뭔가를 반드시 이렇게 해야해 라는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한참을 누워만 있다 어느날은 책을 한 페이지 읽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은 10페이지 정도를 읽었고, 그 다음날은 갑자기 집을 나서서 운동을 등록했다.
어떤 책을 얼만큼 언제까지 읽을지 정하지 않았고, 매일 할 일도 정하지 않았다.
그냥 손에 잡히는 일을 집중력이 버텨주는데까지 하고, 힘들어질 때 접었다.
어느 날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냥 집 밖을 나서보기도 했다.
그냥 책을 들고 집밖을 나서서 마을 버스를 타고 아무 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안에 들어서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엄청나게 시끄러워져서 내가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도 짜증내거나 화내지 않았다. 그냥 책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다리가 아파올 때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또 어떤 날은 집에 있는 재료들로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다.
내가 생각한 맛이 아니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럴수도 있지. 하고 다음에 만들 요리를 생각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생각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 스스로에게 화내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수도 있는거지 하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마도 나는 우울함의 동굴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다.
적어도 매일 이유없이 눈물이 흐르지도 않고, 책상에 앉는게 어렵지는 않으니.
나와 비슷한 어두운 시기를 겪는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 사람이라도 언젠가 무거운 어두움이 발목을 잡을 때,
그 때에 문득 '아 저렇게 동굴에서 나온 사람도 있었지' 하며 떠오르길 바라면서
내 이야기를 끄적여본다.
'뭔가 해야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가볍고 잔잔한 하루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