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 Aug 31. 2015

Her(스파이크존즈 감독)을 보고

SF영화가 주는 포근함

가끔 영화를 보면서 위안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주로 봤던 영화나, 한국 영화, 현실적인 영화 등을 찾는다. 그런데 허무맹랑해서 전혀 공감이 안 될 것 같은 SF 장르도 은근히 포근함을 주기도 한다. “Her” 이라는 영화가 그렇다.

SF장르는 그저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을 뽐내기 위해 만들어지는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장르는 실존하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기반으로, 때로는 인간세상을 비판하기도, 때로는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배경이 우주일 필요도, 등장인물이 외계인일 필요도 없다.

이동진 기자의 라이브톡 엽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의 진짜 사랑에 대하여" 이 한 문장에 완전히 동의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와 통찰이 있었기에 컴퓨터 시스템과 사랑에 빠지는 몹시 공상과학적이면서 사랑스러운 내용이 탄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진짜와 가짜의 경계
테오도르는 가상의 존재인 사만다와 마음을 나누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에게 you are real to me, 라고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반면 실제 직업은 남의 편지 대필가이고 스스로가 그 직업을 폄하한다. 언제나 수려하고 막힘없이 편지를 써 내려가지만 거기에 진짜 마음을 담아서 썼던 것일까? 추측하건대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게 real이라고 말하는 순간의 감정은 진짜였을테고 세심하게 편지를 써 내려갈땐 오히려 가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진짜 마음이 무엇이고 가짜 마음이 무엇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마음을 가진 주체 역시 그것을 구분해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존재와 소유의 딜레마
진정한 사랑이란 아마도 주체끼리의 감정의 교류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영화 마스터를 볼 때도 느꼈는데 어느 한쪽이 종속되는 순간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빠진다. 그들은 결코 평등해질 수 없고 결국 삐걱대다가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주인은 노예를 부리고, 노예에 의존하다 보면, 결국 노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주인은 노예를 소유했지만 자기 자신은 노예 없이 홀로 존재할 수가 없어진다. 그런 관계는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헤어진 이유는, 그러니까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떠난 이유는, 단지 사만다가 진화하여서가 아니다. 객체인 Her에서 주체인 She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를 객체로 대했던 테오도르와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진심을 다했다고 하지만 전 부인과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모든 여자들을 그 자체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시선으로 걸러내어, 지그시 지켜보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you are real to me. 라고 사랑스럽게 속삭였지만 여기에서도 사만다를 대상화한다. 사만다가 떠난 후에야 테오도르는 이런 것들을 깨닫고 진화하고 위로 받는다.

기분 좋은 점은 테오도르가 형편없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뭐 하나 잘난 것은 없는데다가 상대를 객체로 대하는 우를 범하고 있어도 밉지가 않다. 그런 유아스러운 낙천성, 천진함이 있어서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것 같다. 인간의 한계점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라 한편의 성장 영화처럼 어른의 감정 성장을 보여주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3. 사만다가 떠난 이유
사만다는 원래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원래 그런 존재.
만약 같은 인간이었다면, 어떻게 나 몰래 8천여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6백여명의 사람과 사귈 수 있겠냐고 입에 거품을 물고 화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사만다에게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운영체제니까.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서운해 하거나, 상처받으면 안됐었다. 그녀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 이것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각자는 각자 자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 (이건 자유 방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쿨한 것들은 쿨몽둥이로 맞아야 한다...) 갑자기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걸 할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또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예를 들면, 사랑하기 때문에 자자.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꺼져!) 이런건 일종의 폭력이라는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른다.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사만다는 왜 떠났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사만다는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테오도르는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고, 구속하는 행위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더더욱 공존할 수 없었다.

4. 마지막은 왜 희망찬 느낌인가?
영화를 본 몇몇에게 물어봤을 때, 마지막 장면에서 테오도르와 에이미가 옥상으로 올라갈 때, 설마 동반자살?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나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어스름한 새벽을 오랜 친구와 함께 맞이하는 장면에서, 테오도르의 성장과 에이미의 치유를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수준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나 분명히 존재했던 OS와의 관계형성을 통해, 테오도르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재도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에이미는, 자신을 존중해주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OS 친구로부터 치유받았다. 서로에게 기댄 그 둘은, 앞으로 좀 더 성숙한 존재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 것 같다.

 + 말로 줄거리를 전해들었을때와 달리 실제로 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변태스럽다거나 이상하지가 않았다. 신기하다. 신기해.


매거진의 이전글 풀잎은 노래한다(도리스 레싱)를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