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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송이 Nov 16. 2023

이런 사위 또 없습니다

산타가 나타났다

“송이, 이번 크리스마스는 조용하게 보내자.”     


12월이 시작될 무렵, 신랑과 나는 조용한 성탄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친정 식구들과의 여행도 거절하고, 교회만 다녀오자고 했다. 남편의 전적인 결정이었다. 너무 의외의 선택이어서 “어? 어!” 하다 동의해 버렸다. 우리 부부는 남들 다하는 거대한 트리 구입이나 분위기 좋은 식당 예약, 갖고 싶은 선물 교환 등을 애써 외면하며 지냈다. 이따금씩 ‘남편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나?’ 잠깐 걱정되다가 ‘이러다 말겠지.’ 하며 남모르게 들썩이는 마음을 수시로 가라앉혔다. 올해만큼은 성탄의 주인공을 확실히 모실 수 있겠다 싶었다.     

 

몇 번 들썩이다 보니 크리스마스 전날이다. 감사하게도 직장에서 하루 휴무를 받았다. 백 퍼센트 신이 났지만 ‘아차차. 거룩한 성탄절, 조용한 성탄절.’을 되뇌며 머릿속 한구석에서만 춤을 췄다. 이 기쁜 소식을 곧장 남편에게 전했다. 금, 토, 일 길어진 주말을 두고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는지 “송이송이, 뭐 하지?” 하며 골몰하기 시작했다. “뭐 하긴! 교회 갔다가 장 봐서 저녁에 맛있는 거나 해 먹자. 주말 금방 갈걸?” 작정한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송이! 송이! 송이!”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갑자기 내 이름을 연달아 불러대기 시작했다. “깜짝이야! 왜 왜!”하며 얼굴을 보는데 양 볼은 한껏 치켜 올라가 있고, 그 볼에 밀린 눈은 눈썹달 모양이 되어있었다. 그 좁은 사이로 반짝임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가 재밌는 일을 꾸며낼 때 짓는 표정이다.      


“송이, 생각해 봐. 어머님 산타 못 만나보셨을 거 아니야. 산타로 변장하고 빨간 주머니에 선물 넣어서 깜짝 방문! 어때? 어때! 너무 좋겠지! 너무 재밌겠지!” ‘이럴 수가.’ 역시나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다. “에~에? 진짜? 애들 있는 집도 아니고 무슨 산타야!” 그 표정을 보였다는 건 못 말린다는 뜻이다. 자기 운동 센터 행사에서 사용했던 산타 복장을 가만히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정지용을 누가 말려. 우리는 마치 얼마 남지 않은 밤하늘 순방을 준비하듯 서두르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동생에게 줄 선물 목록을 작성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부리나케 쇼핑을 마치고 새빨간 포장지로 받을 맛이 나게 포장해서 준비된 보따리 주머니에 정신없이 넣었다.     

  

친정집으로 가는 18분 동안 꿈속 같았다. 조수석에 산타가 앉아있다. ‘그럼 나는 산타 부인인가? 아, 매니저인가?’ 낯설지 않은 낯선 사람이 악성 곱슬머리와 턱수염에 얼굴이 파묻힌 채로 스마트폰을 두드리다가 셀카를 찍다가 말을 걸어오는데 몇 번을 봐도 헛웃음이 낫다. 그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꾸며 입었는데 한 사람도 안 마주치냐며 아쉬워했다. 그러다 6층에 도착했다. 마치 짜인 각본이 있었던 것처럼 죽이 척척 맞았다. 나는 도어록을 눌렀고 “디리링” 현관문이 열리자 산타가 재빠르게 쏙 들어갔다. 드르르륵 중문을 열던 엄마의 비명이 들렸다. “아악!” 신랑은 등에 선물 보따리를 이고 뚱뚱한 할아버지처럼 뒤뚱거리며 거실로 들어섰다. “허허허허 허허~ 메리크리스마스! 올 한 해 착한 일을 하셨습니까?” 엄마는 산타를 사위 안 듯이 얼싸안고 등을 두드리며 기특해했다. 아빠는 식탁에 그대로 앉아 재미난 공연 보듯이 웃고 있었다. 두 딸은 까르륵까르륵거리며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대성공이다.              


착한 일은 더 따져 묻지 않고 곧바로 선물 증정식을 마쳤다. 깜짝 방문에 성공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저녁밥은 없었다. 다 먹은 감자탕 앞에 급하게 끓여진 떡국이 놓였다. 엄마는 갑자기 오면 먹을 게 없다며 미안해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남편은 떡국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맛있게 두 그릇을 해치웠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두드렸다. 순간 임무를 완수하고 피곤해하는 산타할아버지가 보였다. 저녁상을 치우는 중에 동생은 빨간 옷을 낚아채서 입고 나왔다. 알고 보니 유치원을 안 다녔던 동생에게도 첫 산타였다. 보따리에 아이스크림을 넣어 나눠주고서 옷을 벗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가 다시 그 옷을 입겠다고 했다. 선물이 없다며 다급하게 곤란해하더니 지갑을 열어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넣고 사위에게 갔다. 아빠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산타들을 지켜보기만 했는데 입꼬리가 들썩거리며 신기해하는 모습이 수줍은 남자아이 같았다.      


나는 아무런 포장지도 뜯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순간이 선물이었다. 가끔 남편과의 기념일을 놓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을 때 “내가 선물이지?” 하며 생색내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 보니 그이가 내게 선물이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진짜 한정판 ‘내 남편’ ‘우리 사위’ ‘우리 형부’. 딸도 갖지 못한 마음을 가진 속 깊은 사람. 앞으로도 일찍부터 고생만 했던 어린 숙자의 잃어버린 인생들을 빈틈없이 꽉꽉 채워줄 거라고 했다. 산타를 만난 어린이, 자전거 타는 소녀, 여행 가서 선글라스 끼고 사진 찍는 아가씨, 청바지 입은 여자, 산타 아줌마까지 그 끝은 정지용 머릿속에만 있다. 올해와 같이 조용한 성탄을 다짐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송이 지용다운 행복한 날을 보내자고 미리 다짐하며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에 초를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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