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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송이 Nov 16. 2023

다정함과 위로가 있는 자리

식탁 고르기 

‘한 번 울면 계속 우는데... 저것도 우네.’      


어릴 때부터 나무무늬의 가구를 좋아했다. 책상, 책꽂이, 침대, 화장대 등등 방에 놓인 큼직한 가구들은 어두운 갈색에 나뭇결이 보이는 것들이었다. 진짜 나무는 아니었고, 그럴듯한 시트지로 덮여있었다. 가구를 사러 가면 항상 그중에서 골랐는데, 원목 가구는 비싸서 엄마도 나도 감히 엄두를 못 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가구들을 어느 정도 사용하다 보면 표면이 상하기 시작한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울다 못해 흩어져 버리기 시작하는 시트지들을 보며 속으로만 했던 말이다.      


2년 전, 결혼을 하면서 드디어 내 살림을 장만하게 되었다. ‘잠이 보약이지! 백만 원쯤이야!’를 외치며 가장 먼저 침대를 골랐다. 적당히 단단하고 쿠션감 있는 킹사이즈 매트리스, 맨살이 닿아도 부드럽고 따뜻한 패브릭 소파, 코코아색 고무나무 원목 식탁, 노란색 체크무늬 이불, 한 가지 색으로 통일한 수건 세트를 고르고 비치하면서 왠지 모를 흡족함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영광의 첫 살림들, 그중 제일 먼저 탈락된 것은 바로 식탁이었다. ‘벌써 운다고?’ 2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조금씩 운다. 겉면도 고무나무인 줄 알았더니 속만 나무고 또 그럴듯한 시트지였다. 어쩐지 합리적인 가격이더라. 야속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고 갈라지고, 의자는 삐그덕거려서 조심조심 앉아야 했다. 살아보니 거실과 주방에서 사용하는 테이블은 안방의 침대만큼이나 중요한 가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세 계약 만료로 새집 장만을 하면서 꼭 좋은 것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딱 하나. 바로 이 테이블이다. 조건은 두 가지다. 원목이어야 할 것, 6명이 앉을 수 있을 것. 여기서부터 시험에 들기 시작했다. 비싸긴 비싸다. 일단 백만 원이 훌쩍 넘었다. 게다가 원목이 실용성이 낮아서 통세라믹, 포세린 세라믹을 올려서 쓴다는 것이다. 무슨 종류가 이렇게도 다양한지 당황 황당 그 자체다. 진짜 하나 장만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 틈을 타 인스타그램에는 수도 없는 가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자기소개를 하면서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새 집에 아이보리색 벽지가 다 도배될 때까지 내 머릿속은 온갖 테이블로 도배되어 있었다. 결국 엄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원목은 관리가 어려울 텐데 관리 쉬운 걸로 해~. 근데 나무가 예쁘긴 예쁘지~? 한두 푼 아니다 그거.” 비싸다고 잔소리만 늘어놓을까 겁먹었는데 원래 그렇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교자상에서 밥 먹어도 상관없었는데...!”     


나는 밥상에서 자랐고, 숲에서 놀았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자마자 맞벌이를 시작한 엄마는 궂은일을 하면서도 보온 도시락에 아침, 점심밥을 챙겨두었다. 저녁에는 무조건 따뜻한 만찬이었다. 엄마와 같이 살던 29년 동안 한결같았다. 엄마에게는 놀라운 재주가 있는데, 딸들이 오늘 뭐가 먹고 싶은지 맞추는 능력이다. 그리고 곧장 밥상에 그 음식이 올려진다. 마법 같은 매일이었다. 제철을 따라, 채소의 색깔을 따라, 채식과 육식이 골고루 차려졌다. 같이 먹는 밥이 맛있고,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바쁜 마음도 여유롭게 했다. 한 달 전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대접해 주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그때도 엄마 밥상이 생각이 나서 큰 감흥이 없었다. 내게는 엄마가 최고의 셰프고, 가장 행복한 식탁이다.       


숲에서 놀았다. 주말이면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해가 쨍쨍하면 쨍쨍한 대로 아빠 차에 올라타 숲과 계곡을 다녔다. 손을 톡대면 움츠러드는 나뭇잎이 있다는 것도, 이파리를 한 잎 한 잎 떼면서 운명을 결정짓는 법도 그때 배웠다. 여름이면 감자를 갈아 발갛게 탄 피부에 발랐다. 가을이면 밤송이를 양발로 잡고 조심조심 쪼개다가 아빠가 나무를 흔들면 저 멀리 도망치기를 즐겼다. 겨울이면 눈 속에 파묻혀 놀다가 두툼하고 무거운 솜이불에 작은 몸을 짓눌리며 뜨듯하게 녹였다. 몇몇 사진을 들여다볼 때면 그곳의 분위기와 숲 속 냄새, 계곡 냄새가 자동 재생된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테이블이 비싸서 고심한 게 아니었다. 그 행복한 식탁을 나도 만들고 싶었다. 오래오래 두고 사용할 수 있는 편안한 자리이길 바라고 있었다. 지치고 힘들 때 떠오르는 안식의 자리, 다정함과 위로가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부모님처럼 말이다. “송이가 좋은 걸로 해! 원목 나는 맘에 들어!” 거기에 남편 의견까지 더해지니 고민은 끝이다.     


이사를 마치고 3주 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목 테이블이 왔다. 이번에는 진짜다. 8명이 앉을 수 있는 거구답게 아주 무겁게 옮겨졌다. 벤치 의자에 등받이도 잘 달려왔다. 은은한 광택이 비치길래 나도 모르게 손으로 쓱 쓸어보았다.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이것이 ‘와 진짜에서는 진짜 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기쁨도 잠시, 배송 기사님은 이물질이나 물기는 되도록 바로 닦아주어야 하고 한 달에 한번 천연 왁스도 발라주어야 한다는 관리방법과 살아있는 원목이라 습기와 직사광선은 피해야 혹시 모를 변형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신신당부하셨다. 8개의 나무 서랍이 아직 뻑뻑하게 열렸는데 길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이 모든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살아있다니! 나랑 같이 나이 먹으며 지내보자꾸나!’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나의 성향과도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에 반가워 금세 애정이 깃들었다.      


집에서 뜬 눈으로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은 단연 거실 창가에 놓인 이 테이블이다. 남편과 나는 식사를 마치고 밥그릇에 밥알이 바짝 말라 붙어 설거지하기 힘든 상태가 될 때까지 일어날 줄을 모른다. 커피를 마실 때도, 텔레비전을 볼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지금처럼 글을 쓸 때도 의자에 붙였던 엉덩이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우리 집에 방문한 몇몇 사람들도 하나같이 진가를 알아봐 준다. ‘오늘 집에 안 가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한참을 앉아있어도 떠날 생각을 않는다. 가면서도 아쉬워한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한동안 볼품없겠지만, 앞으로 평생 밥순이니 조급해하지 말자고 마음은 먹었다. 우리 엄마의 솜씨가 나에게 전수되었을까? 어떤 차림일지는 일단 시간에 맡긴다. 당장 이 테이블에 둘러앉는 사람들과 가족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었으면. 나도 모르게 물려받은 이 다정한 마음이 나와 남편, 이 자리를 통해 오래도록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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