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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찍고 온 홍콩 여행

by 정민유



난 그가 날 잡지 못하도록 전속력으로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려 왔다. 그는 날 잡으려고 뒤쫓아왔지만 내 분노의 괴력을 이길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되자 홍콩의 밤거리를 어딘지도 모르고 마구 돌아다녔다.


내 마음과는 달리 홍콩 시내는 각종 쇼핑센터와 관광객들, 휘황찬란한 불빛들로 넘실거렸다.

그런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러다가 어떤 공원에 다다르게 되었고 그냥 무심코 들어가서 벤치에 앉았다.


'역시 오고 싶지 않았던 예감이 맞았던 거야.'


우린 남편(아니 그땐 만난 지 3개월 정도였으니까 남친)의 생일 기념으로 홍콩 여행을 왔다.

예전에 한번 와봤던 기억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좋아요 당신이 가고 싶다면 저도 좋아요"라고 대답해 버린 것이다.

그때 만약 홍콩이 아닌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갔다면...

그러면 이렇게 다투지 않았으려나..?

암튼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도착 첫날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시내 구경을 하자는 남친에게

"난 피곤해서 좀 쉴게요.."라고 했고

그는 혼자서 나갔다. 나중에 그게 너무 서운했단다.

홍콩까지 와서 혼자 걸어 다니는 게 너무 외로웠다고...

'남의 속도 모르면서..'


사실 그즈음 무릎이 아팠고 오래 걷기가 힘들었었다. 게다가 원래 난 저질체력이었다. 하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하남친에게 그걸 말하는 게 좀 부끄러웠었다.

시작부터 삐그덕 거리던 여행은 3일째 되는 날 저녁에 폭발을 하게 되었다. 그날은 남친 생일이었고 한참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무슨 말을 하다가 그렇게 된 건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당신도 다른 여자들이랑 똑같아"라고 내 진심을 몰라주는 남친의 말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는 거다.

여자에게 상처를 받은 경험이 많아서였는지 그런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종종 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럴 때마다 난 나의 진심을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남친을 납득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날은 그 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내가 그렇게 뛰쳐나가고 얼마나 당황하고 충격을 받았을지...

남친은 내가 내팽개치고 나온 가방을 들고 나를 찾아 홍콩 거리를 찾아 헤매었단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공원 벤치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감정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이제는 호텔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도 잘 모르지만 걷다 보니 우리가 묵었던 호텔이 보였다. 방으로 올라가진 않고 로비에 앉아있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남친이 나타났다. 날 발견하고 혼이 빠진 얼굴로 다가왔다. 홍콩 시내를 날 찾아 돌아다녔다고 했다.

'이 여자 성격 장난 아니네..'

내 욱하는 성격을 보고 적잖이 놀랬으리라.

그래도 그런 내 행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괜찮아? 방으로 올라가자"하며 토닥여주었다.

난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몰라주는 남친이 야속했고 그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온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3년 전이고 연애 초기였고 연하인 남친에게 화 한번 안 냈던 내가 엄청나게 화를 내는 일이 벌어졌던 거다. 그 일을 계기로 내 진심을 의심하는 말은 안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날의 기억이 씁쓸하지만은 않다.

50년 이상 다르게 살아온 두 영혼이 맞춰져 가는데 생길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을 테니까..

암튼 그 사건으로 다른 여자들과는 많이 다른 여자라는 걸 남친은 확실히 알게 되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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