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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유 Nov 01. 2022

부부싸움, 피 터지게 싸우다 여행 간 사연

처음 남편과 영혼의 대화를 한 밤


계획된 여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틀 전에 남편과 다투고 계속 냉전 중이었다.

최근 들어 남편의 계속되는 짜증과 예민한 반응에 난 지칠 대로 치친 상태였다, 갱년기가 와서 그런 거려니.. 하고 넘기기엔 나도 인내의 한계를 넘어버렸다.


어제 점심을 먹다가 내가 그동안 불편했던 감정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남편은 애써 괜찮은 척 밥을 먹다가 나의 말에 돌연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굳이 그 얘기를 다시 꺼내야 해?"

"그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냥 넘긴다고?"

" 당신 마음대로 해"


'도대체 우린 앞으로 어떡해야 하는 거지?'

일단 더 이상 말하기가 싫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주 가는 카페에 앉아 라테를 한 모금 마실 때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나 스트레스 때문에 한쪽 눈이 안 보여. 나 좀 내버려 둬'

'그게 내 책임이야? 나한테 책임전가 좀 하지 마.

나도 지쳤어'

'그럼 난 좋기만 했는 줄 알아? 그럼 내가 또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거지? 당신은 항상 추앙받아야 하자나'


'난 당신 위에 군림하려고 한 적 없어. 날 나쁜 사람 만들지 마. 그게 바로 노예근성이고 피해자 코스프레야. 제발  그만 좀 해'

'당신은 모든 걸 분석하려고 해. 사랑도 관계도 공부해서 배우니?'

'아무튼 확실한 건 요즘 당신이 날 대하는 태도를 보면  미워한다고 느껴져.

증오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 살기 싫어'

'난 못 헤어져 내가  그동안 잘해줬던 것처럼 당신도 나한테 잘해줘 봐'

' 대화가 통해야 얘기를 하지. 나 숨 막혀.  짐 싸서 떠날 거야'


그다음 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사이가 좋았으면 여행을 계획하고 이미 떠났을 거다.

하지만 기념일 따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리곤 KTX 표 검색을 했다. 주말이라 대부분 매진이었고 익산을 쳐보니 표가 남아 있었다.

예약을 하려다가

'나 익산 거야'라고 카톡을 보냈다.

그 카톡을 보내자마자 쏜살같이 답장이 왔다.

'같이 가자  가서 싸우자'라고

그 카톡을 보며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곧바로 집으로 가 짐을 챙겨 떠났다.

길이 많이 막혔고 시간은 이미 4시가 넘었다.

익산까지는 4시간은 족히 걸릴 듯했다.


이럴 때 P성향인 우린 찰떡궁합이다.

'꼭 익산 안 가도 돼'

'그럼 5월에 갔던 공주 갈까?'

'좋아. 그때 갔던 식당도 너무 맛있었자나. 이번엔 특제 백숙 먹자'

그래서 식당에 전화해 백숙 예약을 하고 저녁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보약 같은 백숙을 먹고 숙소도 5월에 왔던 곳에 마침 빈방이 있어서 들어왔다. 

맥주를 앞에 놓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화가 시작되었다. 날 섰던 감정이 누그러져서 편안한 마음이었다.



"난 불편한 마음이 있으면 대화를 해야지 풀려"

"난 솔직히 누군가와 속마음을 나눠본 적이 거의 없어"

경상도 사나이인 남편은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상남자 같은 면이 있다.

" 진짜? 한 번도 없다고? 난 그걸 여태 몰랐네"

" 전화 길게 하는 것도 진짜 싫어해서 여자 만날 때 미리 얘기하고 아니면 못 만난다고까지 했었어"

" 처음부터 나하고는 얘기를 잘해서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

" 그렇게 조곤조곤 대화를 하는 남자는 흔치 않을걸?"


" 난 당신이 요즘 나에게 짜증과 화를 너무 자주 내서 이젠 나에 대한 사랑이 변했다고 생각했어. 만난 지 3년이 넘었으니 그럴 때가 되었다고.."

"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야. 전혀 그렇지 않아.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한 게 없어. 단지 표현을 못했을 뿐이야.  난 요즘도 당신 잠든 모습을 한참씩 바라보고 웃곤 하는데.."

"표현하지 않으면 절대 몰라. 잘 때 그렇게 하지 말고 눈 떴을 때 예뻐해 주면 안 돼?"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집안 살림에 대한 차이, 그동안 자존심 상할까 봐 말하지 못했던 조언, 각자 자라온 집안 분위기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등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처음으로 남편과 속 깊은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브런치에 썼던 <남편에게 갱년기가 왔다>  글을 읽어주었다. 글에는 그동안 나의 감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남편은 작가이기에 글을 통한 소통이 더 익숙하기도 하리라.


그날 속 깊은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넓이가 훨씬 깊어짐을 느꼈다. 

특히 조언을 싫어하는 남편이 내가 조심스레한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고마워했던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3년 4개월을 지켜보며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조언이었기에 통했던 것 같다.

마음속 깊이 쌓아놓았던 묵은 감정들을 털어내고 우린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다음 날 우리의 결혼 2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세상에서 제일가는 나의 영혼의 상담사가 생겼소"라는 남편의 말이 나에게 제일 기쁜 선물이 되었다.

그 이후 우린 첫사랑을 회복했고 오히려  단계 업그레이드된 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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