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혼이혼을 했다.
나에게 가장 친절한 결정
코드가 맞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과 사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지금의 남편과 만나서 살아보니 더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표정만 보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인지 다 느껴지는 관계.
어떤 결정을 할 때도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위해주는 사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작은 표정, 몸짓 하나에도 깔깔대며 웃는 우리.
성향이 너무 다른 사람과 27년을 살 때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노력해도 항상 평행선이었다.
대화를 시작하면 10분 안에 마음이 상했다.
비난과 지적이 일상인 사람 앞에서 난 점점 말이 없어졌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그렇게 10년 이상 되었을 때 세상에 기쁨이라고는 모르는 우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때 사진을 보면 얼굴이 너무 어둡고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생각했던 결혼생활은 이게 아니었는데..
너무 일찍 (24살에) 섣부르게 (53일 만에) 결혼을 했던 거다.
여대를 나오고 연애경험도 거의 없었으니 남자 보는 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선 보고 아빠가 좋다고 하니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버렸다.
어릴 때부터 칭찬을 별로 듣지 못하고 자랐고 열등감과 수치심이 많았기에 지적이나 비난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그런 비난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 사랑받으려고 착하게 맞췄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더 무시하는 말들이었다.
그나마 미운 오리 새끼라고 생각했던 자아상은 벌레가 된 느낌까지 되어버렸다.
남들이 볼 때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을 테지만 정작 내 마음속은 텅 빈 것 같은 공허감으로 빛을 잃어갔다.
사이좋은 부부를 보면 뼛속 깊이 부러웠다.
자녀양육과 외며느리로서의 의무감만 날 무겁게 짓눌렀다.
40대 이후에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참고만 살았었는데 오랜 시간 눌러왔던 분노감이 표출되니 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다들 착하던 사람이 변했다고 놀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면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고 상담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도 하게 되었다.
상담을 받고 공부를 하며 내 자존감은 차츰 회복되었지만 전남편과의 관계는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오히려 무늬만 부부로 갈등은 없었지만 서로에게 아무 관심도 없이 지냈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사랑만 빠져있는 결혼생활을 드디어 끝내야겠다고 어렵게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결혼생활에서 받은 상처들이 내가 참아낼 수 있는 한계치를 넘은 시점일 것이다.
그런 오랜 스트레스와 상처가 암이라는 병을 갖게 된 원인 이리라.
"우리 맞지 않는 사람끼리 참 오래 산 것 같아.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원하는 게 그거였어? 그래 알겠어"
고민 고민 끝에 내 생각을 얘기했고 너무나도 순순히 그러자고 동의해 주었다.
둘 다 부모님의 통제 아래 착한 아들, 착한 딸로 자라 성숙하지 못한 사람끼리의 결혼이었고 결국 27년 만에 끝이 나게 되었다.
딸들에게 가정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은 너무나 컸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너무 여한이 남고 억울할 것 같았기에 오랫동안 피 터지게 고민하고 결정을 한 것이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사시는 분들이 보면 이기적인 엄마라고 욕을 하실 테지만 나에겐 너무나 절실한 문제였고 내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이혼이 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도 내가 살아온 삶을 다 보셨기 때문에 내 마음을 이해해주실 거라 믿었다.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나를 숨 막히게 짓누르는 의무에서 벗어나 하루라도 자유롭고 살아보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지금도 딸들을 생각하면 악몽을 꿀 정도로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도 언젠간 한 여자로서의 엄마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이혼 후에 큰딸이 아빠가 "너네 엄마는 조금만 사랑을 해줬으면 이렇게는 안되었을 텐데..."라고 하더란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워 눈물이 나기도 한다. 건강하지 못한 나를 알뜰살뜰 챙겨주는 모습이 고맙기도 하지만 어떨 땐 짠하다.
행복해 보니 그 전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가 더 확실히 느껴진다.
부부가 사랑하며 산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그렇다고 다투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서로 깊이 사랑하는 걸 너무 잘 안다.
정말 난 비슷한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에 무조건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비록 딸들과의 관계가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딸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힐듯한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황혼이혼은 내게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한 통로였고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