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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유 May 26. 2022

남산 소녀의 부활

어린 시절 기억의 재구성.


어린 시절 남산 밑 이태원동에 살았다.

6살부터 19살까지 14년을 살았으니 나의 학창 시절을 거의 보낸 고향 같은 동네다.


고작 7~8살 정도의 나와 동생을 데리고 아빠는 아침 일찍이 남산 등산을 하셨다.

그 아이들이 그게 얼마나 싫었을지 말 안 해도 짐작이 가실 듯..

억지로 옷을 주워 입고 눈곱도 안 떼고 남산을 올라가는 아이들의 모습.

그 당시엔 남산이 입산금지가 아닐 때여서 산길 그대로 그야말로 등산이었다.

올라가다 보면 가파른 길도 있고 나무뿌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기도 했다.

잘 닦여진 길이 아니어서 조금은 위험하고 많이 힘든 고행길이었다.



그래도 아침 등산의 작은 즐거움이 있긴 했다.

남산 중턱에 신기하게도 계란 프라이를 파는 곳이 있었다. 약간 평평한 곳에 곤로 같은 걸로 대충 차려진 간이 휴게실 같았던 곳인데

열심히 등산을 하고 먹는 계란 프라이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참기름을 두르고 구워낸 계란 프라이의 맛은 지금 생각해도 그 고소함이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산속에 야외샤워장이 있었는데 호기심에 남자 샤워장을 슬쩍 엿보려다가 아저씨들한테 된통 혼이 났던 기억도 있다.

왜 굳이 남자 샤워장을 보려고 했는지..

'참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나 보다' 생각이 들며 귀엽기도 하다.


그렇게 아침마다 남산 등산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세포 속속들이 산의 흙냄새와 나무의 신선한 향이 스며들었나 보다.

성인이 되어 어느샌가 숲 향기를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국민학교도 남산 끝자락에 있었다.

4학년쯤 점심시간에 친구들 몇 명과 학교 뒤쪽으로 올라가서 우리들의 아늑한 아지트를 마련했다.

움푹 파인 곳에 나뭇잎을 잔뜩 쌓아놓고..

마치 허클베리핀의 모험에 나오는 비밀 장소처럼.

점심을 일찌감치 먹고 숲이 우거진 그곳을 찾곤 했다.


그리고 하교하고 친구들과 남산으로 가서 땅속에 있는 송장 메뚜기를 잡으며 놀았던 기억도 있다.

유리병에 송장 메뚜기를 담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와서 동생들에게 자랑을 했다.

거무스름한 메뚜기가 징그럽고 무서울 법도 한데 무서워하지 않았던 거 보면

아마 난 용감한 개구쟁이 소녀였던가 보다.


베프와 개천 탐험을 했던 기억도, 남동생과 몰래 집 앞 공터에서 불장난을 했던 기억도 얌전한 여자아이가 할 행동은 아니었으니..


남산 근처에 살면서 소소한 추억들이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의 저편에 있던 추억들이 아침에 집 근처 작은 숲의 향기를 맡는 순간 빛의 속도로 떠올랐다.



내가 숲의 향기를 그리워하는 건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클라라 집에서 살게 된 후 아무리 좋은 집과 환경이어도 산을 그리워하는 느낌과 비슷하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초기 기억이 이토록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성인이 된 후 이 기억을 잊고 살았었다.

내가 용감하고 개구쟁이 남산 소녀였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의 난 내향적이고 수줍은 소녀였다고만 기억을 한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밝고 용감하고 모험적인 모습을 잊어버렸다니!!!!

상처 덩어리였고 우울했다고만 기억되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재조명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 밝은 빛이 되살아났다. 남산 소녀의 부활이라고나 할까?



요즘 아침 일찍 일어나 작은 숲으로 달려간다.

걷기를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이유가 매일 아침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구나!

눈이 잘 안 떠지는 날도 '가서 숲 향기 맡아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몸이 뭔가에 이끌리듯 저절로 일어난다.


공원이라기보단 정말 어린 시절 남산 아지트 느낌의 숲이다.

도심 한복판에 이런 숲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매일 아침 숲의 향기를 맡으러 다닌 지 벌써 3개월이 되어온다.

걷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 반짝이는 햇볕을 받고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나뭇잎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영혼이 살아남을 느낀다.


몸이 점점 더 건강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고 마음이 기뻐한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만족감과 안정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기쁨'


더 나이 들어 초록의 자연이 가득한 곳으로 귀농을 하며 사는 꿈도 꾸곤 한다.

사실 2년 전에 남산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온 것도 내 내면에 있는 귀소본능 때문이었구나..

어느 곳에 살건 아침에 산책을 하며 숲 향기를 맡는 건 아마 죽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으리라.


이 글을 쓰며 잊고 있던 '남산 소녀의 재탄생'을 자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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