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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Jun 16. 2022

프랑스에서 만난 할아버지

프랑스 여행

  프랑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꼭 식사하러 가보고 싶어서 마음속에 찜해둔 곳이 있었다. 파리 생제르맹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카페 레 뒤 마고(Les Deux Magots)이다. 이곳은 헤밍웨이를 비롯한 세계적인 대문호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글을 썼다는 파리의 전통 있는 카페다. 나는 이곳에서 프랑스식 아침 식사를 하며 여행을 시작하고 싶어서 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숙소를 정했다. 5박 6일 동안 파리에서 머물 예정이었는데, 이 카페 때문에 근처에 숙소를 잡을 정도로 이곳에 대한 나의 기대감은 엄청났다. 파리 공항에 저녁에 도착해서 숙소에 체크인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춰 가야겠다는 생각에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서둘러 아이를 깨워서 숙소 밖으로 나왔다. 파란 하늘과 상쾌한 파리의 아침 공기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한 손에는 지도 어플을 켠 채 휴대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아이 손을 꼭 붙잡고 파리의 작은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창문 밖에 빨간 제라늄 화분이 걸려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이 유럽이 맞구나 싶었다. 옛날부터 문학가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라는 증거인 양 거리 곳곳에는 서점과 작은 출판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파리의 앤틱한 건물들 사이사이를 걷고 있으니 나는 마치 19세기 후반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남자 주인공이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 홀연히 시간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190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과 조우하던 그 장면 말이다. 나도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그들과 마주 앉아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카페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나는 1900년대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드디어 레 뒤 마고 카페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테라스 자리에는 아직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카페 내부에서 커피 한잔과 크루아상을 앞에 둔 채 신문을 읽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만 계실 뿐이었다. 근처에 거주하고 계신 현지인 같았다. 나도 저렇게 우아하게 노년을 보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직원의 안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에 얼른 자리 잡고 싶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레스토랑 직원의 안내가 있기 전까지 입구에 서서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했다. 무례한 한국 관광객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봉쥬흐, 마담!”


  아침 인사와 함께 얼굴에 미소를 띠며 웨이터가 내게 다가왔다. 웨이터는 실내석과 실외석 중 원하는 곳을 물어봤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있다 보면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나중에 곁에 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이를 데리고 흡연석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 아쉽지만 파리 테라스에서 거리 분위기를 느끼며 커피 마시고 싶은 욕심을 내려뒀다. 나는 실내석에 앉고 싶다고 했더니, 웨이터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이 자리 어떠냐고 했다. 건너편의 생제르맹 성당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였다. 나는 흔쾌히 그가 제안한 자리에 앉았다. 역시 아침 일찍 카페에 도착한 보람이 있다며, 부지런히 준비하고 나온 스스로를 칭찬했다.



  다른 테이블의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들처럼 나도 빵과 커피를 주문했다. 건강을 생각해서 샐러드라도 한 접시 시켜야 할까 고민했다. 그렇지만 파리에서는 아침으로 이렇게 빵과 커피를 마신다고 하니 나도 오늘은 파리지앵이 되어보자 싶었다. 진한 유지방이 들은 우유와 블랙커피를 반반 섞었더니 고소한 라테가 완성됐다. 커피 한 모금과 함께 버터 풍미 가득한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프랑스에서는 아무 빵집이나 들어가서 빵을 사 먹어도 다 맛있다고들 하던데, 유명 카페에서 첫 빵을 먹으니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맛있는 빵과 커피 그리고 고풍스러운 성당 뷰. 모든 것이 완벽한 아침이었다.


  빵을 한입 먹을 때마다 너무 맛있다고 아이랑 감탄사를 연발하며 아침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카페에 한 할아버지가 들어오면서 씩씩거리는 소리를 냈다. 영어로 “저기는 내가 늘 앉던 자리였는데, 십 년이 넘게 내 자리였는데….” 하고 큰 소리로 불평을 하며 우리 옆 자리에 와서 앉았다. 순간 몹시 당황스러웠다. 내가 마치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은 국제적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테이블을 꽝꽝 쳐대며 불어로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계속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 욕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로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앉아서 계속 불만을 토로하니 빵이 목구멍에 콱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한테 주문을 받으러 왔던 웨이터도 머쓱한 지 할아버지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한 번씩 내 눈치도 봤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한테 자리 바꿔준다고 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남은 빵을 마음 편히 씹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렇게 괴팍한 할아버지라면, 내 말에 무슨 반응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배려한다고 말 꺼냈다가 더 큰 화를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거둬들였다. 수다쟁이 우리 딸도 할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말없이 그냥 빵만 먹을 뿐이었다.


  유럽 카페나 레스토랑은 테이블 간 간격이 아주 좁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려면 조심스레 몸을 살짝 빼야 옆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앉은 자리나, 할아버지가 앉은 옆 자리나 위치가 거기서 거기다. 보이는 뷰가 동일하고, 같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게 될만큼 똑같은 공간이다. 아무런 차이가 없는 자리를 두고 연신 구시렁거리며 아침 식사를 하는 별난 할아버지와 우리는 마치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 것 같았다. 내가 앉은 자리가 헤밍웨이가 앉았던 자리라도 되는 걸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렇게 자기 전용석을 빼앗겼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뿜는지…. 도무지 그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자리 뷰 좋지? 그 자리가 이 카페에서 제일 좋은 자리라서 난 거기에만 앉아. 오늘은 너한테 양보할게.”


  이 정도 위트 있는 멘트로 불만을 돌려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자기 나라에 온 여행객에게 자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웃픈 해프닝을 겪으며 파리에서 우리의 첫 식사가 마무리됐다. 난 이 카페 근처에 숙소를 예약하며 파리에 머무는 동안 2~3일은 여기에서 아침을 먹을 계획이었다. 호텔 조식 대신 역사적인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 호사를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심술쟁이 단골 할아버지를 또 마주칠까 두려워서 그다음 날부터 갈 수 없었다.


  그 할아버지는 나한테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게 아니었다. 우리 딸에게 레 뒤 마고 카페는 예술가들이 사랑한 전통 있는 카페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저 괴팍한 프랑스 영감님을 만난 곳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엄마, 카페에서 우리한테 뭐라 했던 할아버지는 우리가 간 뒤에 자리를 옮겼을까? 그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그 자리에 앉고 싶었을까?”


  “엄마, 그때 카페에서 테이블 꽝꽝 치던 할아버지 있잖아. 그 할아버지는 바게트를 이렇게 먹었어. 안에 부드러운 속만 먼저 다 뜯어먹은 다음에 겉에 딱딱한 부분은 따로 먹더라.”


  “나도 그 할아버지처럼 빵 먹어야지.”


  프랑스를 떠나는 날까지 딸아이는 바게트를 먹을 때면 할아버지 흉내를 냈다. 아이가 세계적인 문학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작품을 궁금해하며 읽어보길 바라던 나의 허튼 꿈은 공중으로 다 날아가버렸다. 내가 의도한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아이가 파리 명소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본다.


  갑자기 그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하다. 오늘도 그분은 레 뒤 마고 카페에서 아침을 드셨을까? 오늘은 전용석에 앉아서 기분 좋게 아침 식사를 하셨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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