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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Aug 11. 2022

레토르트 육수를 끓여먹다가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한여름의 산후조리

우리 집 음식에는
인공 조미료가 안 들어가도
맛있지?


  

  사위한테 밥상을 차려주실 때마다 장모님이 자부심을 갖고 하시던 말씀이다. 자타공인 살림꾼이던 친정엄마의 부엌에는 갖가지 식재료와 주방도구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유일하게 없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인공 조미료다. 엄마는 MSG의 도움 없이 모든 음식을 맛깔나게 만드는 요리 마법을 부리시곤 했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음식에 길들여지다 보니 나는 요리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매일 먹고살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되도록이면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만들려고 노력해봤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연 식재료만 가지고 웰빙 음식을 만들어먹고 싶은 욕심이 때로는 내 몸을 해치는 주범이 되기도 했다. 살림에 서툴고 관심이 적은 나에게 과한 요리 욕심은 주방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높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국수를 먹고 싶은데 이 더운 날 고기 육수를 끓이고, 국수를 삶는 일을 상상해보라. 머릿속에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덥고 습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갑자기 부엌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음식 배달 어플에서 쌀국수를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내 몸은 자극적인 외부 음식에 길들여졌고, 통장 잔고도 동시에 줄어들게 됐다. 더 비극적인 사태를 맞이하기 전에 악순환을 끊어버려야 할 것 같았다.


  스마트한 시대인 만큼 요리를 손쉽게 할 수 있는 보조재가 참 많다. 그동안은 엄마의 요리 철학을 계승해보겠다고 관심 두지 않았던 쇼핑 품목이다. 하지만 요리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주기 위해서 나한테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는 걸 최근 들어 깨닫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제조한 레토르트 육수를 여러 봉지 구매했다. 그날그날 끌리는 메뉴에 따라서 소고기 육수, 닭 육수, 멸치 육수를 골라가면서 요리에 활용해봤다. 파우치를 뜯어 냄비에 육수를 담고 끓이는 동안 냉장고에 있는 갖은 채소와 고기를 꺼냈다. 손쉽게 준비하는 한 끼 식사지만 영양소 균형은 맞춰보겠다는 마음으로 다양한 재료를 넣어가며 국수와 찌개, 샤부샤부를 해 먹었다.



  

  불볕더위가 이어지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요즘 같은 날씨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하며 요리한다는 게 쉽지 않다. 특히나 아이 여름방학 동안 매일 삼시 세 끼를 차려내야 하니 최대한 주방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게 주부의 마음이다. 레토르트 육수 한 봉지만 있으면 한여름에 불 앞에 서있는 시간을 줄여주면서도 맛있는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니, 그저 감동이었다. 이렇게 유용한 살림법을 선택한 스스로의 결정에 만족스러워 어깨를 으쓱거렸다. 국수를 후루룩 한 젓가락 먹고, 고기 국물을 한 입 떠 넣는 순간 갑자기 친정엄마 얼굴이 떠오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삼복더위 중에 아이를 낳았다. 초복이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출산을 하고, 그 해 여름 내내 엄마는 산후조리하는 나를 위해서 뜨거운 국을 끓이셨다. 매일 부엌에 서서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미역국, 사골국, 맑은 지리 매운탕 등 다양한 국물 요리를 해주셨다. 더운 날 엄마 몸에서 육수처럼 땀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불편한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국물 요리가 이제 지겨워서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내가 너 먹으라고 끓이는 국이 아니야. 다 우리 손녀딸 젖 먹이려고 하는 거지.” 친정엄마는 신생아 손녀딸을 위해 국 끓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덕에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 이제는 키가 거의 나만해졌다. 영양가 있는 엄마의 산후조리 음식을 받아먹은 나 역시 산후 후유증이라는 걸 모르고 잘 지냈다.


  마트 배송 서비스도 없고, 음식 배달 앱도 없던 시대에 식구들을 위해 두 손 무겁게 장을 봐오고 매 끼니 정성스러운 음식을 준비하던 친정엄마. 그렇게 차려주신 밥상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만 먹고살았다. 내가 엄마가 되고, 주부가 되어 밥상을 차려보니 이제야 깨닫는다. 매일 반복되던 엄마의 노력이 얼마나 위대하고 멋진 것이었는지…. 과연 나는 우리 딸이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면, 우리 엄마처럼 정성스럽게 국을 끓여줄 수 있을까? 딸이 한 겨울에 출산을 한다 해도 난 그렇게 못 해줄 것 같은데 벌써부터 걱정된다.


  여름날 이글거리는 태양보다 더 뜨겁고, 요 며칠 물폭탄처럼 쏟아지던 빗물보다도 더 많이 넘치던 엄마의 사랑을 받고 살아서 감사하다. 엄마처럼 웰빙 음식을 매일 정성스럽게 차려낼 자신은 없지만, 내 방식대로 뜨겁고 넘치게 아이를 사랑해야겠다. 내가 엄마 딸이라는 게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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