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로리나 Aug 18. 2022

몰라줘서 미안해

호야 꽃

  우리 집에는 5년을 함께 해온 반려식물이 있다. 반려식물이라는 표현보다는 그냥 동거식물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한 집에서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나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는 못했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 물주는 일 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한주 거를 때가 종종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내 마음의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냥 지나칠 때가 수두룩했다.


  나의 지독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 화분의 식물 2가지는 꿋꿋하게 잘 견뎌냈다. 그 식물은 호야와 홍콩야자다. 키우기 쉽고 공기정화 효과도 있어서 집 안에서 키우는 화분으로 많이 추천되는 종류들이다. 이 식물이 우리 집에 처음 온 날은 지금처럼 무더웠던 여름날이었다. 매주 참석하던 플라워 클래스에서 그날은 화분에 식물을 심었다. 더워서 꽃이 금방 시드는 계절이니까, 오랫동안 두고 볼 수 있는 식물을 심자는 취지였다. 선생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나는 꽃이 좋아서 이 수업을 듣는 건데….’ 처음 데려올 때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화분이었는지, 매주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아두던 클래스 후기에 이 화분 이야기는 없다.


  삭막해 보이는 집 안에 초록색 식물이 자리 잡고 있으면 인테리어 효과가 있긴 한다. 그래서 화분을 거실 가운데 잘 보이는 곳에 두기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움직이는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찾아왔다.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키우게 된 반려견이다. 처음에는 아이를 위해서 입양한 강아지였지만, 며칠 사이 이 녀석은 나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아지를 혼자 집에 두고 잠시 외출이라도 하려면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저 화분부터 강아지 입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야 할 것 같았다. 귀여운 내 새끼가 화분에 있는 작은 돌멩이라도 집어먹는다 생각하면 끔찍했다. 결국 화분은 거실 구석 선반 위로 옮겨졌다.


  안 그래도 화분 물 주기를 제때 안 하는데, 잘 안 보이는 구석으로 위치가 바뀐 뒤로 내가 잘 챙겼을 리가 없다. 홍콩야자 잎이 시들시들해져서 하나씩 떨어지고, 호야의 도톰한 이파리가 말라 뒤틀리기 시작할 때쯤이면 한 번씩 내 손이 화분으로 향했다. 며칠 전에도 딱 이런 상황이었다. 게으름을 부릴 대로 부리다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겠다 싶어 화분을 들고 욕실로 갔다. 샤워기를 손에 들고 손을 휘휘 돌려가며 시원하게 물을 뿌렸다. 화분 물 주기를 무척이나 귀찮아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물방울을 머금은 화초를 보면, 목이 타들어가던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다.


  화분 속의 물기가 빠지길 잠시 기다렸다. 다시 화분을 제자리에 가져다두기만 하면 나의 임무는 끝난다. 화분을 들어 올리려고 허리를 구부렸는데 초록색 무성한 호야 잎 사이로 연한 자줏빛이 도는 무언가가 보였다. 구겨진 종이가 떨어진 줄 알았다. 왜 쓰레기가 여기에 들어갔지 하고 집어 올리려다가 화들짝 놀랐다. 분갈이 한번 해주지 않은 화분 안에서 비좁은 틈을 뚫고 꽃이 피어있었다. 이리저리 엉킨 줄기에 눌려있는 꽃을 살살 위로 빼냈다. 꽃잎 하나라도 떨어질까 조심스러워 숨까지 참은 채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마치 새 생명을 두 손에 받아낸 것처럼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다양한 꽃을 봐왔지만 이토록 신비로운 꽃은 처음이다. 세밀하게 빚은 도자기 공예품 같고, 정교하게 만든 일본 화과자를 닮기도 했다. 종이 딱지를 접어둔 것 같은 정오각형 꽃봉오리가 펼쳐지면 그 안에는 작은 별들이 빛나고 있다. 하얀 별 안에 자주빛깔 별, 그 안에는 노랑 별. 손톱 크기만 한 작은 꽃송이 안에 별을 3개나 품고 있다니, 몸집은 작지만 마음만큼은 부자 같은 꽃이다. 12송이 자그마한 꽃송이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며 한참 동안 감상했다. 물 주기 귀찮다고 며칠 더 게으름을 부렸다면 이 멋진 광경을 놓칠 뻔했을 텐데,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숨은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이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편한테 호야 꽃 사진을 보내줬다. 5년 동안 키우면서 한 번도 호야에서 꽃피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신기한 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제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는 식물이 참 대견하다며 칭찬까지 더했다. 그때 갑자기 반짝이는 호야 꽃 위에 남편 얼굴이 오버랩됐다.

 

  남편 앞에서 나는 애 키우며 직장 다니는 워킹맘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맨날 툴툴거렸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에게 집중해보겠다며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둘이 하나씩 나눠지던 짐을 남편의 양 어깨에 무겁게 올려줬다. 두배가 된 짐덩이에 하루 종일 짓눌린 남편이 퇴근 후에 편히 쉴 수 있게 내조라도 잘했으면 다행일 텐데…. 뒤늦게 나의 진짜 꿈을 찾아보고 싶다며 온갖 자기 계발 활동에 몰두했다. 중간중간 쉬는 타이밍에는 두 눈에 하트를 그린 채 아이와 강아지를 바라봤다. 일부러 피하려고 남편만 비껴간 건 아니었지만, 나와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항상 우위에 있다 보니 남편 케어는 뒷전이었다.


  15년을 함께 지내온 아내의 숱한 무관심 속에서도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이지만 반가운 목소리로 딸들에게 인사부터 건넨다. “우리 이쁘니들, 오늘도 잘 지냈어?”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는 날은 묵직한 김밥이 담긴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우영우 본방 보는 날은 김밥 먹고 싶어질 테니까 사 왔어.” 매일 김밥만 먹는 드라마 주인공 우영우를 보고 있다 보면 갑자기 김밥이 당기는 게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사 온 김밥에 담긴 진심을 안다. 더운 날 저녁 밥하느라 힘들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마음이 보인다.


  남편을 닮은 호야 꽃의 꽃말은 뭘까 검색해봤다. 꽃말을 알고 나니 더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고독한 사랑, 그리운 사랑, 아름다운 사랑’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빛내는 모습이 외로워 보이면서 동시에 찬란하다. 홀로 밤하늘에 떠있는 고독한 별이지만 우리 모녀를 지켜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빛을 내는 든든한 남편인데, 그동안 수없이 노력한 시간을 몰라줘서 미안하다. 어쩌면 다 알지만 굳이 인정하고 박수쳐주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공을 높이 사는 만큼 내 노력이 작아 보일 것 같고, 내가 지금보다 더 애써야 할 것 같아서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남편에게 나는 이미 사랑하는 가족이다. 내가 더 잘하고 못하고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나를 아껴주고 보살펴준다. 나 역시 그 마음을 그대로 배워서 표현하기만 하면 될 텐데, 그동안 왜 못했을까….


  호야의 매력을 발견한 순간 호야는 나의 반려식물이 되었다. 이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호야에게 향한다. 내 곁에 있는 소중한 나의 반려인, 남편을 향한 눈길에도 애정과 관심을 담아주고 싶다. 앞으로는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밤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봐야겠다. 나를 향해 반짝이는 나의 별이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MBTI 성격이 정반대인 엄마와 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