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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Nov 03. 2022

뭐든 경력이 될 수 있다!

폼폰 국화

  일을 그만둔 지 1년 반이 넘었다. 시간적 여유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게 사탕보다 더 달콤했고, 주중에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제 아이가 슬슬 사춘기에 접어드는 걸까? 아이는 친구들과의 약속이 부쩍 늘었다. 학교 끝나면 학원 가기 전까지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들어온다. 내가 아이를 위해 오후 시간에 해주는 일이라고는 간식 한번 챙겨주는 거 말고는 딱히 없다. 어떤 날은 내가 준비한 간식보다 더 먹고 싶은 메뉴가 있다면서 스스로 간식을 차려먹기도 한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아이 곁에서 작은 것까지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나 보다. 그럼 이제 나는 뭘 하지? 다시 경제 활동을 슬슬 시작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뭐가 있을까 아무리 떠올려봐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해보겠다며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디지털 드로잉에 도전하고, 취미로 즐기던 꽃꽂이에도 전문성을 기르려고 공들여봤다. 막상 취미로 즐길 때는 다 재미있었지만, 그걸 활용해서 수익을 내보려고 하니 자신 없었다. 창업 경험이 없던 사람들도 많이 도전한다는 무인 가게를 차려볼까 싶어서 무인 편의점과 스터디 카페에 관심을 기울여보기도 했다. 초기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항상 남의 월급만 받으며 살아온 나는 과감한 투자에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답답했다. 대학 졸업 이후로 줄곧 해온 일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직장을 벗어나는 순간 혼자만의 힘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우울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딱히 조언을 구할 사람도 없었다. 내 주변은 대다수가 과거의 나처럼 안정적인 직장의 울타리 안에서 월급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현실 세계에서 조언을 구할 사람이 없다면 책 속에서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 멀리하던 자기계발서와 부도서를 매일 펼쳐 들었다.


  자기계발서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비슷비슷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 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수없이 도전하라는 것이다. 뻔히 아는 사실이지만 책 제목을 바꿔가며 비슷한 류의 책들을 읽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내면 의식 세계가 바뀔 때까지,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들에게 동화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읽던 중 경제 유튜버로 유명한 신사임당, 주언규 님이 쓴 <킵고잉>이라는 책의 내용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는 소액이라도 고정 수입을 만들어내고, 그 수입으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투자를 계속 반복적으로 할 것을 권했다. 당장 팔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재능을 팔아서 고정 수입을 만들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했던 것처럼 박람회를 부지런히 둘려보며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보길 추천했다.


  일단 재능이 있으면 재능을 파는 게 가장 손쉬운 일이다. 잠시 생각해봤다. 내가 오랜 시간 준비하지 않고 약간의 노력만 기울이면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과거에 하던 일을 떠올려봤다. 15년이나 같은 일을 했으니 온통 내 머릿속에는 나의 재능, 커리어 하면 직장 생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일을 활용해서 프리랜서로 뭔가를 하기에는 준비 기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회사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완하기 위해 자격증 취득, SNS 채널 개설 및 확장 등 갖춰야 할 게 많았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일도 아니다. 기대 확률이 낮은 일에 진을 빼기 전에, 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매일 하고 있는 일 중에 가치 있고 성과가 나타나는 일은 뭐가 있지? 불현듯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엄마표 수학’이다. 나는 7년 차 엄마표 수학 경험자다. 우리 아이에게 초1 과정부터 현재 중등 수학까지 지도 중이다. 다행히 아이는 아직까지는 나의 수학 수업에 불평 없이 잘 따라오고 있고, 곧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는 수학 학원에 다녀본 일이 없지만 문제를 곧잘 푼다. 아이한테 무리하게 선행학습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집에서 수학 문제집 푸는 걸 봐주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진행 상황이 괜찮아서 현재까지 유지 중이다.


  오래전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는 대학시절 수학 과외로 용돈을 벌었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로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일이었지만, 제법 적성에 잘 맞았고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괜찮은 편이었다. 가르치던 학생이 대입 수능을 보고 나면 과외 하나가 자연스럽게 종결됐고, 감사하게도 학부모님들의 소개로 다음번 과외를 또 이어갈 수 있었다. 그때는 내가 학생들보다 몇 년 더 일찍 입시를 경험했기 때문에 다양한 노하우를 알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기초 교육의 중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입시 대비에는 별 관심 없이 최근 10여 년을 보냈다. 내가 예전과 동일하게 입시생 과외를 한다는 건 불가능이다. 하지만 난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보며 알 수 있었다. 나는 수학 공부에 진심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수학을 체계적으로 쉽게 접근하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일을 즐겼다는 사실을….


  어쩌면 내가 아이가 고학년이 된 지금 시점에도 학원에 보내지 않고 엄마표 수학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한줄기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수학 교육에 대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구나. 최근까지 아이의 성장과 함께 초등 수학과정을 계속 훑어보고 가르쳤으니, 이걸 다른 학생들에게도 가르쳐주면 되겠다 싶었다. 게다가 학부모들 중에는 나와 교육관이 비슷해서 지금껏 선행학습을 하지 않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학원은 영영 보낼 수 없는 곳이 된 케이스가 있을 것 같았다. 대다수의 학원은 현행 과정보다는 선행 학습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에 초중등 수학 교육이 필요한 학생이 있다면, 내 아이를 가르치는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가르치면 좋을 것 같았다.


  전문가와 의뢰인을 연결시켜주는 온라인 서비스에 나의 프로필을 등록했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최대한 강조했다. 나는 경력이 많은 전문 과외 선생님이 아니다. 생생한 입시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젊은 대학생도 아니다. 그러나 나 같은 엄마 수학 선생님을 필요로 하는 학부모가 다만 한두명이라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혹시라도 아무도 의뢰를 하지 않으면 어쩌나 조금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무자본으로 시작하는 일이니까 겁낼 필요는 없었다.


  한두 시간이 지난 뒤부터 견적 요청이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워낙 요즘은 어플 기능이 좋아서, 비슷한 지역에서 서비스 제공이 가능한 사람과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 사이에 단순히 소개를 해주는 구조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요청이 1건씩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최대한 우리 집에서 가까우면서 수학 교육을 시키는 목적이 나와 유사한 사람 위주로 선별했다. 견적서를 받은 사람 중에는 읽고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히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고 상담 요청을 해주신 학부모님이 2분이 계셨다. 통화를 해보니 나와 교육관이 비슷하고, 그동안 아이한테 학습을 시켜온 방식이 우리 집과 유사했다. 다만 워킹맘이라서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부족하니, 엄마같이 아이를 돌봐주며 수학 교육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중이라 했다. 전문 경력이 없는 나를 믿고 아이를 맡기시는 그분들께 행여라도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갑자기 다시 학생들 과외를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꼭 직장 안에서 쌓은 경력만 나의 커리어가 되는 건 아닌가 보다. 내가 걸어온 한 걸음, 한걸음이 연결되어서 나의 이력서가 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수학 과목을 가장 좋아하던 소녀, 중고생을 가르치던 아르바이트 대학생, 내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던 엄마, 이 모든 순간이 소중한 경력이 되어 나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성실히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다한다면 그 길은 나를 근사한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일은 첫 과외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다. 새로 만나는 학생에게 진심을 담아 성실히 수학을 가르쳐줘야겠다는 다짐의 의미로 오늘 오후에는 하얀 국화를 한단 사야겠다. ‘성실, 진심’이라는 꽃말이 담긴 하얀 폼폰 국화! 새하얗고 동글동글 귀여운 폼폰이를 닮은 아이들이 수학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나는 진심을 담은 수학 강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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