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피스
꽃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관심 갖게 된 사회공헌 활동이 있었다. 플라워 리사이클이라는 의미를 가진 플리(FLRY) 활동이다. 결혼식장에서 버려지는 꽃을 재활용해서 사회적 나눔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니, 콘셉트만 들어도 참 아름답다. 신랑 신부가 결혼식 꽃을 기부하겠다고 신청하면, 자원봉사자들이 식후에 꽃을 수거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결혼식장을 장식하는 꽃은 고급스럽고 싱싱한 최상품을 사용한다. 한번 쓰고 버려지기에는 아까운 꽃들이다. 그런데 이 꽃들을 재활용한다니, 환경 보호 측면에서나 사회 공헌 차원에서나 훌륭한 활동이다.
‘나 결혼할 때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새삼 내 나이가 많은 게 아쉬웠다. 이다음에 우리 딸 결혼할 때는 꼭 결혼식 꽃을 기부하자고 딸과 미래의 사위에게 이야기해야겠다며 아주 먼 미래를 기약했다. 내가 자원봉사자가 되어 플라워 리사이클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때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플로리스트도 아닌 주제에 꽃을 활용한 재능기부활동에 참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황금 같은 주말 시간에 자원봉사 활동을 갈 만큼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한동안 코로나의 여파로 결혼식이 진행되지 못하거나 소규모로만 진행되다 보니, 주변의 결혼 소식도 뜸해졌다. 그렇게 플리 활동은 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이제 팬데믹 기간이 지나고 많은 것이 점점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단계가 되었다. 덕분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플리 활동이 재개된다는 온라인 홍보글을 보게 됐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몇 년간 꽃꽂이 덕질을 꽤나 많이 했다. 자격증은 없지만 이제는 누구 앞에서 꽃 손질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내 안에서 끓어올랐다. 배우고 익혔으면, 그다음 단계는 나누는 일이다. 일정 시간 혼자 수련을 하고 나니, 예전에는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던 일에 도전해보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설레는 마음으로 플리 자원봉사자 신청서를 작성했다. 제발 뽑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며칠 후 기분 좋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자원봉사자 선정 소식과 함께 활동 안내를 전달받았다. 무슨 대회 수상이라도 한 것처럼 뛸 뜻이 기뻤다. 동시에 걱정이 조금 되기도 했다. 나만 전문 플로리스트가 아니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은 만큼 얼굴도 두꺼워진 걸까, 실력이 안 되면 쓰레기 처리라도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걱정을 내려두었다.
기다리던 활동 날짜가 다가왔다. 나는 평소 주말 아침이면 늘어지게 늦잠을 자며 여유 부리는 타입이다. 이날은 알람 소리와 함께 벌떡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식구들 먹을 아침, 점심밥을 챙겨놓고 나도 든든히 아침을 먹었다. 가서 우아하게 꽃꽂이할 게 아니라, 꽃 나르고 물통 나르며 힘쓰겠다고 생각하니 평소보다 밥을 두배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마침 활동 장소가 옛 사무실 근처에 있는 노인요양시설이었다. 출퇴근길에 늘 다니던 길을 나서는데, 기분은 사뭇 달랐다.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어쩜 그렇게 발걸음이 가볍던지, 내 모습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요양원에는 커다란 꽃 박스가 먼저 도착해있었다. 아직은 결혼식 자체가 코로나 이전만큼 많지 않고, 혼주들이 하객들에게 꽃을 답례품으로 드리는 경우가 많아서 기부되는 꽃이 많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 활동에는 꽃 농장 직배송 서비스 업체인 어니스트플라워에서 꽃 기부를 해주셨다. 갖가지 꽃을 다양하게 기부해주셔서 어르신들과 꽃 종류에 대한 말씀만 나눠도 이야깃거리가 잔뜩일 것 같았다.
자원봉사자는 모두 5명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그중에서 전문 플로리스트는 딱 1명이었다. 나를 포함한 4명은 꽃을 좋아해서, 내가 좋아하는 꽃에 대한 즐거움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었다. 순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예전에 플리 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는 3명이 간단히 활동 노하우를 알려줬다. 어르신들이 오시기 전에 준비를 마치기 위해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플로랄폼을 물에 담가 두고, 서둘러 테이블 위에 꽃을 나누어 올려뒀다. 어르신들께서 장미꽃 가시에 손을 다치시지 않도록, 미리 가시를 제거해두는 일도 놓치지 않았다.
행사 준비가 거의 다 되었을 즈음, 어르신들께서 한두 분씩 들어오셨다. 꽃향기로 가득한 방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분들이 “와아, 좋다!”하고 탄성을 지르셨다. 마스크 너머로 환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역시 꽃이 가진 힘이란, 처음 만난 사이에도 어색할 것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해 준다.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나와 같은 테이블에서 꽃꽂이를 하게 된 할머니 두 분께서 인사하셨다. 꽃꽂이 수업을 처음 하는 생초보라서 내가 할머니들께 잘 부탁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리어 내게 공손히 인사하시니 송구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선생님’이라는 말이 마법처럼 내 두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긴장할 것 없이 차분하게, 어르신들께 꽃을 다듬어 드리기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어차피 꽃 자체가 예뻐서 어떻게 꽂아도 결과물이 좋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 초보자들이 꽃꽂이를 할 때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플로랄폼에 꽂을 꽂아서 고정하는 방법이다. 초록색 스펀지처럼 생긴 플로랄폼은 물을 흠뻑 흡수한 뒤 꽤 오래 머금고 있는다. 꽃에게 물 공급하는 역할과 단단하게 꽃을 고정하는 역할을 동시에 해주는 유용한 재료라서 자주 쓰인다. 반면에 재활용할 수 없고, 잘 썩지도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어서 나는 플로랄폼 사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초보자에게 꽃꽂이를 꽤 그럴싸하게 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에는 이 방법만큼 좋은 게 없다. 그리고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 입장에서는 물을 자주 갈아주지 않아도 되는 꽃장식이 좋다. 그래서 이날 행사 주체 측에서도 플로랄폼을 활용한 꽃꽂이 재료를 마련했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들께서 플로랄폼에 꽃을 꽂으실 수 있도록 가위로 줄기를 잘라드렸다. 꽃 얼굴이 큰 꽃은 짧게, 잔잔한 꽃은 길게 잘랐다. 꽃들의 높낮이를 서로 다르게 꽂아주기만 해도 리듬감 있는 꽃꽂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월의 흔적만큼 주름진 손이지만 꽃을 조심스레 받아 쥐시는 할머니들의 두 손은 참 고왔다. 손끝 감각이 얼마나 좋으신지 꽃의 색감을 다양하게 섞어 적절한 위치에 하나하나 꽂아서 예쁜 꽃장식을 완성하셨다. 내가 해드린 거라고는 꽃을 잘라드린 것 밖에 없는데, 본인들이 다 꽂으셔놓고는 마지막에는 나에게 공을 돌리셨다. 선생님이 잘 가르쳐줘서 예쁘게 꽃꽂이를 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순간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는지 모른다. 나의 첫 수강생 할머니들 덕분에 나도 플라워 클래스 강사가 되어볼 수 있었다.
이날 플라워 클래스에서 만든 꽃장식은 센터피스였다. 센터피스는 테이블 가운데 올려두는 꽃장식으로 식사나 대화 자리를 분위기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데이트할 때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처음 만나 어색한 사이라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을 때는 같이 테이블 중앙의 센터피스를 바라보며 자연스러운 대화를 시작해볼 수도 있다. 분명 주인공은 꽃장식이 아니지만, 테이블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앉아서 은근하게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주는 아주 고마운 존재가 되어준다. 이날도 센터피스는 즐거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르신들과 센터피스를 가운데 두고 사진을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 모른다. 꽃과 함께 어우러져서 포즈를 취하시는데, 젊은 인싸들보다도 포즈를 더 잘 잡으셔서 깜짝 놀랐다. 꽃을 만지고 향기를 느끼면서 한 번 즐겁고, 다 만든 센터피스를 배경으로 사진 찍느라고 또 한 번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활동이 마무리됐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화사한 꽃을 한 아름 들고 기분 좋게 돌아가시는 어른들 뒷모습이 떠올랐다. 꽃이 좋아서 꽃으로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나선 날이었다. 반대로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행복을 잔뜩 선물 받아 왔다. 봉사활동이 시작되기 전에 활동 리더가 강조했던 말이 있다. 플리 활동은 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들과 소통을 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원봉사 활동이 처음인 데다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서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향기로운 꽃이 어색한 내 마음을 감싸줬고, 화사한 꽃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꽃을 통해 이날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내가 할머니들께 전달한 것은 어쩌면 꽃이 아니라 관심과 소통의 메시지였는지도 모르겠다.
플리 서포터스 활동은 1회의 참여로 끝났다. 아직은 모임을 활성화하기에 조심스러운 단계라서, 주체 측에서도 정기 활동으로 가져가기는 부담이라고 한다. 결혼식이나 행사장 꽃 기부가 예전처럼 많지 않은 게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꽃이 전해주는 축복을 예식장의 신혼부부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플리 활동이 세상에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멋진 첫걸음에 꽃 기부가 더해진다면, 신랑 신부의 앞날에 더 큰 축복이 내릴 수 있으니까 ^^